예술에 정답 있다는 생각 뒤집는, 위아래 뒤집힌 그림

2025-10-23

옛동독 출신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동양 여자’

2015년에 출간된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내용도 재미있지만 도발적인 제목 때문에도 좋아하는 책이다.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201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대인이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대체로 애증이 아닐까 싶다. 애국심은 지난 시대의 가치로 전락했다. 너무 잘 알지만 벗어나기 힘든 대상에 대해서는 비판과 자조의 태도가 자연스럽다.

역사 직면한 용기와 대담함

조국에 대한 강렬한 애증을 밑거름 삼아 작업을 해온 예술가로 독일의 게오르크 바젤리츠가 있다. “독일인이어서 행복하다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딜 가든 독일인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독일 미술은 기본적으로 추하다”. 모두 그가 한 말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독일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그보다 더 강렬하게 드러낸 작가도 없다.

그림의 형태 한눈에 파악 어려워

색채·질감 먼저 관찰하게 만들어

히틀러 집권 5년 차 옛동독 출생

조국에 대한 애증을 예술로 승화

추상·구상 모두 거부한 반골 기질

독일 미술, 유럽 최고로 격상시켜

이러한 태도는 물론 독일의 역사와 관련 있다. 2차대전 이후, 국가의 위상과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활동을 시작한 독일의 예술가들은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던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들이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던 독일의 미술을 유럽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를 ‘독일 미술의 기적’이라고 표현하며, 히틀러가 망가뜨린 독일의 예술을 전후의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주역으로 요제프 보이스, 안젤름 키퍼, 그리고 게오르크 바젤리츠 등을 꼽았다. 비결은 역사를 직면한 용기, 그리고 대담함이라고 분석했다.

게오르크 바젤리츠는 구동독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38년은 히틀러가 집권한 지 5년 차 되는 해였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종전과 함께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바젤리츠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교사로 재직하는 학교 건물 내에 살았는데, 어린 소년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교사의 아들로서 급우들 사이에서 소외되기 일쑤였던 그는 일찌감치 아웃사이더의 삶으로 들어섰다.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미술에서 재능을 발견했다.

18세에 동베를린의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두 학기 만에 퇴학당했다. 사유는 ‘정치적 미성숙’. 당시 동독의 대학은 사상이 불순해 보이는 학생을 내쫓아 탄광에서 1년간 일을 시킨 후에 다시 입학 절차를 밟게 하는 방식으로 길들였다. 바젤리츠는 그 해 유일하게 퇴학당한 학생이었다. 엄청난 불명예였다. 아버지가 대학을 찾아갔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결단을 내리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1957년, 아직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의 일이었다.

서베를린의 예술 대학으로 옮긴 직후인 1958년에는 ‘미국의 새로운 회화’라는 제목의 전시가 유럽의 예술계를 강타했다. 잭슨 폴록·마크 로스코 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전시로 베를린과 파리, 런던을 순회했다.

CIA 후원 잭슨 폴록 그림에 충격

바젤리츠는 잭슨 폴록을 보고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스무 살까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자란 그는 미국을 무기나 잘 만들지 문화적으로는 미개한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물감이 흩뿌려진 초대형 캔버스는 유럽의 당시 전위미술을 훨씬 앞지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기금을 댄 이 전시는 체제 홍보의 성격이 다분했다. 이 사실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시류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반항적 기질은 오히려 추상 미술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했다.

많은 동료들이 국제적 대세인 추상미술에 몰입할 때 그는 거꾸로 독일 미술의 전통을 되짚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뤼네발트, 뒤러,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에밀 놀데. 그가 참조한 독일의 낭만주의와 표현주의 화가들은 아름다움이나 조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칠고 어두운 분위기, 격정과 분노, 추함이야말로 독일 예술에 내재된 고유함이라고 생각했다.

스물다섯에 열린 첫 개인전은 전설로 남았다. 갓 문을 연 신생 갤러리에서 열린 무명화가의 전시였지만 개막 다음 날에 ‘화랑가의 충격’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일부 작품이 외설스럽다는 이유였다(이미지가 궁금하다면 ‘바젤리츠 하수구’로 검색해보시라). 경찰이 화랑에 들이닥쳐 작품 두 점을 압수했다. 갤러리스트와 작가는 포르노그래피라는 비난을 받으며 재판장에 섰다. 베를린 지방 법원이 “성적 욕망을 자극하고 윤리의식에 어긋난다”며 400마르크의 벌금형을 내렸다.

훗날의 바젤리츠는 당시 그림들에 대해 ‘사춘기 짓거리’라고 회고한다. “일상에서는 늘 돈이 부족해 배가 고프고, 예술적으로는 방향을 잡지 못해 실망과 분노를 거듭하던 젊은 시절 (…) 그저 내 마음처럼 불편한 그림을 만들고 싶었다.” 여기에 새로운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서독의 분위기에서 어디까지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려는 도발적 반항심도 한몫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탄생한 시리즈가 1960년대 중반의 ‘영웅들’이다. 당시의 서독은 소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누리며 과거 따위는 돌아보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그런 와중에 바젤리츠의 그림 속 영웅들은 마치 과거에서 걸어온 유령 같은 모습으로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영웅들’ 연작은 전부 건장한 남성들을 담고 있다. 찢긴 제복 사이로 뒤틀리거나 훼손된 신체가 드러나 공격성과 연약함을 동시에 암시한다. 어두운 배경과 거친 붓 터치가 자아내는 암울하고 황량한 분위기. 당시 독일로서는 외면하고 싶었을 전쟁의 기억을 소환하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1969년, 바젤리츠는 위아래가 뒤집힌 ‘거꾸로 그림’을 발표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무렵 전 세계 미술계는 구상이냐 추상이냐를 두고 논쟁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바젤리츠는 국제미술의 주류인 완전한 추상도,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연결되는 전통적인 구상도 따르기 싫었다. 무엇보다도 추상이든 구상이든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예술의 정신에 어긋나는 ‘헛짓거리’라고 생각했다.

딜레마에 빠진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은 그림의 위아래를 뒤집어 형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없게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감상자는 대상을 인식하기 전에 색채나 표면의 질감과 같은 ‘물리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을 우선적으로 맞닥뜨린다. 그리고 서서히 형상을 가늠하면서 작품의 내용을 해석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머리를 쓰기 전에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단계를 확보하여 작품의 바깥에서 안으로 서서히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바젤리츠의 ‘거꾸로 그림’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바젤리츠의 첫 전시를 열고 함께 법정에 섰던 갤러리스트로부터 1989년에 구입한 ‘동양 여자’다. 현재 과천관에서 전시 중이다. 2m가 넘는 대작이라 그 앞에 서면 유화 물감의 거친 물질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국제적 명성 얻고도 실험 계속

단순하지만 혁신적인 방식으로 국제적 명성을 쌓은 이후에도 바젤리츠는 새로운 시도와 도발을 계속했다. 1980년에 안젤름 키퍼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을 대표했을 때는 처음으로 조각 작품을 출품했다. 도끼와 톱으로 나무를 깎아 거칠고 조악하게 만든 인물 조각은 한쪽 팔을 들고 있는 자세가 나치식 경례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물론 작가는 부인했다.

그런데 마치 나무토막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듯한, 그림 형제의 동화에 등장할 법한 기괴하고 무표정한 인물, 한쪽 팔만 살짝 들어도 히틀러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결국 독일이라는 나라의 대외적 이미지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70대 이후 바젤리츠는 노년과 죽음을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 이즈음의 인터뷰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을 추동했던 세상에 대한 회의감과 비관주의가 이제는 사라졌다며 웃음을 지었다. 자신과 아내의 몸을 모델 삼아 노쇠하고 병든 신체를 그린 작품들은 젊은 시절의 격정과 분노에서 벗어나 초연함과 무상함을 담고 있다. 단색조의 화면에서 전과는 다른 고요함이 느껴진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예술가들은 확실히 국가와 역사에 대해 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국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원동력으로 이토록 개성 넘치는 세계를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바젤리츠는 독보적이다.

사회적 메시지나 역사적 내용을 직접 다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국가와 시대의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지극히 개인적 소재를 다룬 노년의 작품들에서도 다른 의미를 읽어내게 된다. 이제,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있다고.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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