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빠르게 진행되는 글로벌 군비 경쟁이 세계 방위산업계를 흔들고 있다.
유럽의 안보를 더 이상 떠맡으려 하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에 충격을 받은 유럽은 자체 방위산업 진흥과 군사력 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에서도 무기 수요가 증가하는 모양새다.
북한과의 전면전에 대비하고자 무기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유지해온 한국으로선 새로운 무기 수출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예전에는 러시아가 세계 시장에 무기를 대량 공급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수요를 먼저 충당할 수밖에 없고, 반(反)러시아 기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 각국의 정치적 문제가 겹치면서 러시아의 공백은 K방산이 메우게 됐다.
하지만 국내 및 수출 시장에서 벌어지는 업체들 간의 고강도 경쟁, 수주 성과가 특정 지역이나 국가에 편중된 문제, 미래 먹거리 발굴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현재 성과는 일시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세계 곳곳서 수출 성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 이후 대폭 축소됐던 서방 세계 방위산업 역량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계기였다.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양의 무기를 지원하면서 자국의 군비 증강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미국과 유럽 방위산업의 생산 능력이 부족했다.
이같은 ‘빈틈’을 한국과 이스라엘이 파고들었다. 양국은 고강도 무력충돌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무기 생산 능력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성능을 높여왔다.
또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해 예전부터 현지에서 꾸준히 마케팅 활동을 펼쳐왔다. 이는 유럽의 긴급 소요에 대응할 기반이 됐다.
러시아와 인접한 폴란드는 한국을 선택했다. 옛소련산 전차와 자국산 자주포 등의 중화기를 아낌없이 지원한 폴란드는 전력 공백을 신속하게 메우고자 한국 무기에 주목했다.
폴란드와의 초대형 무기 수출 관련 기본계약은 2022년 7월에 체결됐다. 같은해 8월 124억달러(약 18조원) 규모의 1차 계약이 이뤄졌다. K-2 전차 180대, K-9 자주포 212대, FA-50 경공격기 48대 등을 공급하는 계획이 포함됐다.

10월에는 천무 다연장로켓 288대를 구매하는 60억 달러(약 8조5000억원) 규모의 기본계약이 체결됐다.
2023년 12월부터는 K-9 자주포 152대를 시작으로 개별 계약이 순차적으로 진행중이다. 최근에는 K-2 전차 180대를 추가 판매하는 2차 계약도 기대되고 있다.
개발 일정 등을 감안해 초기 물량은 기존에 폴란드에 수출했던 것처럼 한국군과 동일한 사양의 K-2를 공급하고, 후기 물량은 폴란드가 요구한 능동파괴장치(APS) 등을 탑재한 K-2PL이 인도될 예정이다.
루마니아는 2023~2024년 신궁 휴대용 지대공미사일과 K-9 자주포를 구매했다. 러시아와 인접한 유럽 국가(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폴란드, 루마니아, 튀르키예)들이 한국산 자주포로 무장하는 ‘K-9 벨트’가 형성됐다.
중동에선 천궁Ⅱ 지대공미사일이 두각을 나타냈다. 천궁은 항공기 격추만 가능하나 천궁II는 항공기와 탄도미사일 요격이 가능하다. 가격도 미국산 패트리엇(PAC-3)보다 훨씬 저렴하다.
중동은 과거 옛소련의 영향력이 강한 곳으로 이라크나 아랍에미리트(UAE) 등에선 러시아산 무기를 구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 무기 판매가 주춤해지자 한국산 무기들이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사우디, UAE, 이라크가 천궁Ⅱ를 선택했다.
사우디와 UAE는 천무 다연장로켓을 구매했고, 첨단 기술을 활용한 역내 공동개발도 이뤄지고 있다. 잠수함 등의 후속 사업도 중동 지역에서 거론된다.
동남아에선 FA-50 경공격기와 군함(필리핀), K-9 자주포(베트남) 등이 거론되며 중남미에도 페루에 군함을 공급할 예정이다.

◆풀어야 할 과제도 많아
K방산이 세계 시장에서 각광받고 있으나, 과열되는 경쟁 등의 문제도 커지고 있다.
방위산업 진흥을 위해 1983년 설치됐던 전문화·계열화 제도가 2008년 폐지된 직후 국내 방위산업계는 본격적인 경쟁체제로 접어들었다.
방산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이뤄졌지만, 지금은 경쟁 격화로 인한 갈등 증폭과 사업 지연 등의 문제가 두드러진다.
2010년대 초반 5조원 규모 한국군 전술정보통신체계(TICN) 사업을 둘러싸고 LIG넥스원-방위사업청-삼성탈레스(현 한화시스템)간의 갈등은 법정 다툼으로 번졌다. KF-21 탑재 능동전자주사(AESA) 레이더 시제업체 선정 등에서도 논란은 지속됐다.
8조원 규모의 한국형차기구축함(KDDX) 사업은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전력화 지연 우려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해외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여전하다. 호주 호위함 사업에선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별도로 참여했다가 모두 탈락했다. 캐나다·폴란드 잠수함 사업도 양측이 각각 뛰어들었다.

방위사업청 주도로 수출 사업에서 HD현대중공업은 수상함, 한화오션은 잠수함을 각각 주관하며 입찰 참여 시 양사가 상대 기업을 지원하는 ‘원팀’ 양해각서(MOU)를 맺었지만, 실효성 논란이 있다.
HD현대중공업과 LIG넥스원은 최근 콜롬비아에서 열린 국제 해양방위 컨퍼런스에 HDS-1500 잠수함을 선보였다. 콜롬비아, 페루 등 한국산 무기를 구매한 국가를 겨냥한 행보로 풀이된다.
한화오션은 대우조선해양 시절 태국에 판매한 호위함의 후속 사업을 노리고 있다. MOU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천궁Ⅱ 지대공미사일 이라크 수출도 체계통합을 맡은 LIG넥스원과 다기능레이더를 생산하는 한화시스템이 갈등을
빚었다. 양측간 갈등의 여파가 천궁Ⅱ는 물론 장거리 지대공유도무기(L-SAM)를 비롯한 방공체계 수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와 관련해 방위사업청의 정무적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업체들이 해외 시장에서 출혈 경쟁을 벌이면 마진은 떨어지고 정부 차원의 지원도 한계가 있다. 수출 사업 입찰 전에 방위사업청이 관련 업체들의 수출 활동을 조정해서 최적의 수출 ‘원팀’을 구성, 정부 차원의 지원을 집중한다면 K방산의 수출 경쟁력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업체들의 경영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국내 방산업체들 간의 해외 수주 경쟁과 갈등이 상당한 논란을 빚었던 만큼 정부가 최소한의 조정·통제를 하는 것이 K방산의 대외 이미지 관리 등을 위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방산수출 성과가 특정 국가·지역에 편중된 것도 우려스런 대목이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24 국제무기거래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2020~2024년 한국의 3대 무기수출 대상국은 폴란드(46%), 필리핀(14%), 인도(7%) 등이었다.
폴란드가 한국산 무기에 높은 신뢰를 보낸 덕분이지만, 폴란드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방산수출이 큰 영향을 받을 위험도 그만큼 높다.
유럽연합(EU)은 최근 8000억 유로(1261조 원)를 투입하는 유럽 재무장 계획을 발표했는데, 역내 방위산업 육성 차원에서 유럽산 무기 구매 기조가 강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천궁Ⅱ도 중동 지역에만 수출이 이뤄졌고, T-50 계열 항공기는 수출 물량의 절반 이상이 동남아에 집중되어 있다. 이같은 편중을 극복하려면 선진국·사회주의권 시장에 진출하는 K방산 아이템이 더욱 늘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선진국들이 한국산 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해야 기술적 측면에서 우수성을 인정받고 부가가치를 높이면서 개발도상국 시장 진출에도 더 큰 동력을 얻는다. 사회주의권 국가 중에서 서방과의 교류를 늘리거나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국가들에게는 한국산 무기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수출이 잘 이뤄지고 있는 K-2 전차, K-9 자주포 등 재래식 무기의 뒤를 이어 글로벌 방산시장에 출시할 미래 아이템 확보도 과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세계 각국은 재래식 무기 대신 전략적 억제능력을 지닌 첨단 무기 확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일 수 있다.
미국과 유럽 방산업체들은 낮은 가격 또는 우수한 성능 등의 특징을 지닌 미사일, 인공지능(AI), 드론 등을 개발하고 있다. 한국도 이같은 추세에서 조금이라도 뒤쳐진다면, 현재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릴 수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