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세뱃돈 3만원, 지금은 ‘신사임당’급
주는 사람 “5만원” vs 받는 사람 “10만원”
지출 줄이고 세뱃돈 준비 안 하겠다는 사람도
설 명절 ‘빳빳한’ 신권 규모 최근 5년간 최저
“돈 아닌 정(情)의 문제…명절 본질 재해석”
(2)주는 사람, 받는 사람 마음 다른 적정 ‘세뱃돈’ 논란
지난 24일 서울시 마포구의 한 은행. 조카들에게 줄 설 세뱃돈용 신권을 교환하기 위해 은행에 들른 직장인 김모씨(45)씨는 이번 설엔 얼마를 준비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물가가 오른 만큼 전보다 돈을 더 주고 싶지만 김씨의 주머니 사정은 녹록치 않다. 전세 대출 이자부터 부모님 용돈 등 고정적으로 나갈 비용을 고려하면 세뱃돈 지출은 해가 갈수록 점점 부담이 된다.
김씨는 “누나가 3명이라 조카들도 대학생부터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유치원생까지 5명으로 많다”며 “작년에 세뱃돈으로 대학생 조카에겐 15만원, 고등학생 10만원, 중학생 5만원,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에겐 3만원을 줬는데 이번 설엔 왠지 더 줘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30대 직장인 이모씨는 지난해 설 명절을 잊을 수 없다. 이씨가 세뱃돈으로 초등학생 조카에게 3만원, 유치원생 막내에게 1만원을 줬는데 조카들이 입을 뾰로통 내밀며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새언니도 은근히 눈치를 줘 이번엔 5만원권을 준비했다.
이씨는 “예전엔 어른들께 세뱃돈을 받는다는 것만으로 기뻤는데 요즘 애들은 얼마를 받았는지 친구들과 비교한다고 하더라”며 “돈을 적게 준 것 같아 내가 부족한 이모가 된 기분이었다. 세뱃돈 문화가 간소화되거나 아예 주고받지 않는 방식으로 바뀌면 좋겠다”고 말했다.
팍팍한 경제 여건 속에 설 세뱃돈을 준비해야 하는 이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물가 상승의 영향으로 세뱃돈 평균값도 10년 만에 최대 3배 이상 증가하며 명절 지출 부담이 늘 전망이다.
2015년 잡코리아가 직장인 728명에게 중고등학생 대상 적정 세뱃돈을 조사한 결과, 32.6%가 3만원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올해 롯데멤버스가 진행한 20대 이상 남녀 2000명 조사에서는 36.4%가 중학생은 3~5만원, 46.8%가 고등학생에겐 5~10만원이 적당하다고 답했다.
실제로 중학생이 세뱃돈으로 3만원을 받았다고 가정하고 10년 전과 현재 물가를 비교해 봤다.
주말 CGV에서 일반 상영관 청소년 티켓 1장을 끊고 팝콘과 콜라를 곁들여 영화를 본다면 2015년에는 1만4500원이 들었지만, 올해는 2만1500원이 필요하다. 영화 관람 후 빅맥 세트와 배스킨라빈스 싱글레귤러 사이즈 아이스크림까지 먹게 되면 2015년에는 세뱃돈에서 7200원이 남았지만 올해는 오히려 2600원이 부족해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돈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 적정 세뱃돈에 대한 인식도 2배 이상 차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카오페이가 이달 22일부터 23일까지 이틀간 진행한 투표에서 세뱃돈을 받는 주 연령대인 10대의 60%가 10만원을 적정 금액으로 본 반면, 세뱃돈을 주는 입장인 40대~60대의 70%는 5만원이 적당하다고 선택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이어지며 세뱃돈은 단순한 전통 풍습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이다.
22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전국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 명절 소비인식 조사’에 따르면, 31.6%는 ‘작년보다 지출을 줄일 계획’이라고 답했다. 지출을 줄이는 이유(복수응답)로는 ‘지속되는 고물가’(58.9%)가 가장 많았고, ▲경기 불황 지속(36.7%) ▲가계부채 증가(31.0%) ▲소득 감소(29.1%) 등의 순이었다.
경제적 부담으로 세뱃돈을 아예 준비하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롯데멤버스 조사 결과 성인 2000명의 22.8%는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설 세뱃돈을 준비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 같은 응답은 지난해보다 6.3%포인트 뛴 것으로, 전체 응답 항목 가운데 가장 큰 폭의 증가다.
21일 SK커뮤니케이션즈 조사에서도 성인 3795명의 36%가 ‘세뱃돈을 주고받지 않겠다’고 답했는데, 이는 지난해 29%에서 1년 새 7%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명절을 앞두고 늘어나는 소비는 예년에도 물가 상승의 촉매 역할을 했지만, 올해는 고물가가 겹치며 체감하는 부담이 한층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올해 설 명절 전 신권 교환 규모는 최근 5년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세계일보가 한국은행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13일에서 23일까지 한국은행 화폐교환 창구를 통해 교환된 신권은 2만6285건으로, 2021년(10영업일)보다 1만2882건 줄었다.
천소라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물가 상승에 따라 세뱃돈 자체도 인플레이션 됐지만 세뱃돈을 주는 주체의 소득이 이에 대응할 만큼 늘지 않아 지갑을 열기 쉽지 않은 실정”이라며 “높게 책정된 세뱃돈 균형 가격에 맞춰 ‘옆에서 신사임당을 꺼내니 나도 꺼내야 면이 선다’, ‘남들은 얼마 줬다더라’ 등의 한국식 경쟁 심리나 비교 문화도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세뱃돈을 둘러싼 경제적 부담과 전통적 가치의 충돌이 점점 두드러지는 가운데, 가족 간 정을 나누는 명절의 의미와 문화 본질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다.
천 교수는 “덕담과 감사의 표현은 물질적인 화폐 가치로만 해석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면서 “얼마를 주느냐에 더 관심을 쏟기보다 마음을 주고받는 표현으로써 세뱃돈의 본질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국윤진 기자 soup@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