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 대법관’의 숙고

2025-05-05

15년 전 어쩌다 보게 된 영화는 <12명의 성난 사람들>이었다. 18세 소년이 친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12명의 배심원은 평결을 위한 회의에 모인다. 배심원 12명 중 11명이 유죄 의견, 단 1명이 무죄 의견이다. 배심원들의 성향은 천차만별이다. 온순한 사람, 다혈질인 사람, 강직한 사람, 차분한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 우유부단한 사람, 생떼 쓰는 사람. 누군가는 빨리 야구 보러 가야 한다며 끝내자 보채기도 한다.

한 명의 의지가 무죄 평결 이끌어내

평결은 만장일치가 원칙. 12명이 동의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1명을 회유하면 쉽고 빠른 일이라고 생각이 드나, 인내심을 갖고 근거와 논리로 버티는 한 명은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회의실을 짓누르는 공기는 처음에는 비아냥과 냉소, 나중엔 격정과 긴장감, 그리고 결국엔 차분한 설득 속에서 온화함으로 변한다. 12명은 무죄로 평결을 내린다. 절대다수 배심원의 냉소를 깨고, 안달복달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기어이 의견을 바꾸게 했던 것은, 사람의 인생을 놓고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의구심 속에서 단정에 맞서 끝끝내 버틴 배심원 한 명의 완강한 의지였다.

2024년 12월14일 윤석열의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된 후 파면이 결정된 2025년 4월4일까지 111일간 시민들이 탈진하듯이 버텨오는 동안, 평론하는 이들과 정치 고관여층은 헌법재판소와 관련한 온갖 ‘카르텔’에 대한 음모론, 재판관들의 성향, 파면을 찬성한 숫자와 반대한 숫자에 대한 추측을 말하고 썼다. 미디어 역시 이를 받아적고 화면에 띄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12월3일 국민이 눈으로 확인한 바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론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며칠 전 퇴임한 문형배 헌법재판관은 진주에서 자신에게 장학금을 주며 학업을 이을 수 있게 했던 김장하 선생을 만나 “시간이 늦더라도, 만장일치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소수의견조차도 한번 담아내보자”는 의지로 판결문을 쓰기 위한 의견 조율 과정을 설명했다. “사건을 보자마자 결론이 서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걸 검토해야 결론을 내는 사람도 있”다며,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며 그 조율의 과정에 대한 경의와 함께했던 동료들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시작할 때 만장일치였는지에 대한 여부는 중요치 않게 되어버렸다. 이런 숙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질 때, 시민들은 결론과 상관없이 안심을 느끼고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된다.

대법원 판결 내용보단 과정이 의문

윤석열의 내란으로 앞당겨진 대선 정국, 국회 다수당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 후보가 된 이재명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앞서 3월26일, 고등법원은 1심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뒤집고 무죄 판결을 내렸다. 고법은 “공소사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이르지 못”했기에 무죄를 선고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4월22일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이례적으로 빠르게 9일 만인 5월1일 유죄 취지 파기환송을 판결한다.

판결의 내용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가지만, 마음이 가진 않는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원이 판결하면 따라야 한다. 외려 6만페이지에 달하는 사건기록을 대법관 12명 모두가, 판결문을 작성할 수 있었던 8일이라는 물리적 기간 동안 다 읽었냐는 비판에는 마음이 간다. 수십년간 법조문과 법학을 연구하고 다양한 사건기록을 살폈을 대법관의 전문성과 합리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건기록을 최소한 요약해서라도 읽었으리라 믿는다. 카르텔 운운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의 생물학적 생존이 경각에 달렸던 영화 속 형사재판처럼, 이번 판결은 비단 특정 후보의 지지율뿐만이 아니라 가장 파격적인 주장에 따르면 유권자가 선택할 다수당 후보의 존재 여부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통령의 형사상 특권을 다루는 헌법 84조 해석 문제도 대기 중이다.

헌법재판소와 사법부를 손쉽게 공격하는 극단주의의 준동 속에 국민의 정치적 민감도는 높다. 예능 대신 뉴스와 시사 유튜브를 보는 시대다. 이번 대선은 누구 탓도 아닌, 대통령이 내란으로 헌정질서를 파괴해 앞당겨진 대선이다. 12명 대법관이 숙고를 통해 내린 판결로 사법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 기대하는 게 과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법과 제도를 다루는 이들의 숙고가 없다면 민주주의 체제는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광기는 시민의 존재를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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