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의 ‘간첩 범위’ 확대는 세계적 추세

2025-12-08

세계는 지금 보이지 않는 정보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첨단기술과 국방력이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에 국가기밀과 산업기밀을 보호하는 방첩(Counter-Intelligence) 활동은 국가안보의 핵심 울타리가 됐다. 대한민국 경제와 국격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국가가 지켜야 할 기밀 범위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행법에서 방어 체계는 1953년 휴전협정 당시의 낡은 틀에 머물러 있다. 마치 녹슨 성문처럼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반도체·2차전지 같은 첨단산업기술은 물론이고, 세계 10위권으로 발돋움한 방산 무기 수출은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하지만 국내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를 노리는 외부 위협은 더욱 거세지고 지능화하고 있다.

방첩 대상 범위 넓히고, 역량 강화

형법 개정안 국회 조속 처리 기대

국정원, 검·경·방첩사 협력하길

최근 잇따라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들은 현행법의 공백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고 있다. 2024년 6월 중국인 유학생이 부산 해군기지에 정박한 미국 항공모함 등 군사시설을 무단 촬영해 중국 SNS에 유출했다. 평택 미군기지와 수원 공군기지 등에 대한 중국인의 드론 촬영 시도는 평시에도 한반도가 얼마나 광범위한 정보 수집 활동의 표적이 되고 있는지 일깨워 줬다. 2017년 국군정보사령부 군무원의 군사기밀 30여 건 유출 사건은 내밀한 국가정보가 얼마나 쉽게 외국 정보기관에 넘어갈 수 있는지 그 민낯을 드러냈다.

이런 행위들이 발각되더라도 현행 형법으로는 이들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다. 형법상 간첩죄는 오직 ‘적국’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한 자만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처럼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범위를 확대해야 하는 이유다.

자국 이기주의가 판치는 새로운 안보 환경에서는 과거의 명확한 적국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적대 관계 여부를 따지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오늘날의 국제정세에서 특정 국가를 적국으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현실적 제약 때문에 현행 법체계에서는 국가기밀 유출 행위를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위반 등을 적용해 경미한 처벌만 가능하다. 이는 국가안보의 핵심을 훼손한 중대 범죄를 솜방망이 처벌함으로써 정보 유출에 대한 경각심을 무디게 한다.

한국이 국가안보를 지키는 법적 방패막이를 낡은 상태로 방치하는 동안 다른 주요 국가들은 안보 환경 변화에 맞춰 방어 수단을 이미 대폭 강화했다. 미국은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적용을 확대하고, 영국은 2023년 국가안보법을 도입해 처벌 수위를 대폭 높였다. 중국도 2023년 간첩법을 개정하면서 국가기밀 유출뿐 아니라 국가 안보 및 이익 관련 문서·데이터·자료 유출까지 처벌 범위를 확대했다. 이처럼 적국 여부와 관계없이 국익과 안보를 침해하는 모든 형태의 첩보 활동에 대한 방어 수단을 강화하는 것이 세계적 흐름이다.

이처럼 엄중한 안보 환경 변화를 직시한 이종석 국가정보원장은 인사청문회 당시 간첩죄 개정 필요성을 역설했다. 다행히 간첩죄 적용 범위를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하는 형법 개정안이 지난 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했다. 야당도 반대하지 않았다. 국가안보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반영된 결과다. 개정안의 핵심은 적대 관계 여부를 떠나 외국의 정보 활동으로부터 국가안보를 침해하는 행위를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국가기밀 유출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국가안보는 곧 경제안보이고, 이는 결국 우리 모두의 민생안보로 직결된다. 첨단기술 유출은 수십년간 쌓아 올린 산업 경쟁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 군사기밀 유출은 국방력을 약화해 국가 생존을 위협한다.

이번 기회에 국회가 간첩죄 적용 범위를 확대한 형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조속히 처리하길 기대한다. 이를 통해 낡은 법적 굴레를 이제는 벗어던져야 한다. 법 개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법이 마련되면 국가정보원을 중심으로 검찰·경찰·국군방첩사 등 관계기관이 힘을 모아 방첩 정보 공유 및 대응 체계를 정비하고, 명확한 법적 절차 안에서 국가기밀 보호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법 개정 이후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국가안보와 국익수호를 위해 맹활약하길 기대해 본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후곤 변호사·전 서울고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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