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을 쑥스러워할 수 있기를

2025-01-01

한 해를 돌이켜보며, 그간 새겨둔 데이터들을 꺼내어 보았다. 1년 동안 쓴 글, SNS 포스팅, OTT 시청 기록, 찍어둔 책 사진들, 일정 수첩에 박힌 지난 약속들을 나열하고 보니 2024년도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연초에 호기롭게 세웠던 목표 가운데엔, 우선순위에서 밀려 은근슬쩍 소멸된 것들도 있었다. 인공지능 기술이 개인을 아주 뾰족하게 파헤쳐서 기어이 그 사람의 목표를 다 달성하도록 돕고 심지어 조종까지 하는 세상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일본어 가타카나 철자를 끝끝내 못 외울 것 같다.

데이터에는 기억과 감정이 새겨져 있다. 지난해 1월, 명함 애플리케이션에 수십장 우르르 박힌 이름들에는, 1년간 이렇게까지나 깊어질 줄 꿈에도 몰랐던 사람들과의 첫 만남이 배어 있다. 업계에서 자주 보게 될 벤처캐피털 교육 과정 동기들이 묶인 날이었다. 3월18일에는 무척 만나보고 싶던, 눈이 정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창업자를 마주했었다. 분당의 한 건물 1층에서 만나 서로 동공을 살짝 떨며 얘기했던 순간이 엊그제 일인 것만 같다. 6월 초에 갔던 학회와 11월 마지막 날 갔던 학회는, 연구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은은한 감동 같은 것을 잔뜩 머금게 해줬다. 개인적으론 연구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되새기게 해준 시간 조각들이었다.

데이터를 돌이켜보는 것은 기술 기반 서비스들 입장에서도 고객을 붙들 중요한 가치 제안이다. 몇년 전 애플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오래 화면을 들여다보고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한 자체 기능으로 ‘1년 전 오늘’ 같은 사진첩 추천을 꼽았다. 요즘은 사진 인식 기능을 더해 더 다양한 추천을 제공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도 5년 전, 10년 전의 포스팅을 소환하며 고객들을 묶어둔다. 그 시절 친근하게 댓글을 주고받던 사람들을 태그해 응답하게 만든다. 이용이 끊겼던 사람들도 “얼마 만에 댓글을 달아보는지 모르겠다”며 소홀했던 네트워크에 도로 발을 들인다.

별다른 맥락 제안 없이 공공에 기록된 숫자 데이터를 보다가도 눈물을 쏟을 수 있다. 전 세계 비행 기록을 수집하는 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2024년 12월29일 7C2216편은 공항 코드 BKK에서 오전 1시30분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이륙은 2시29분에 했다고 한다. 공항 코드 MWX에 도착이 예정된 시간은 오전 8시30분이었지만, 8시59분에 착륙했다고 써 있다. 이후 이 편의 모든 비행 스케줄은 취소됐다. 우리가 아는, 무안공항에서의 비극이 숫자와 코드로 나열돼 있었다. 우리는 이 숫자들과 비행편의 문자들을 잊기 힘들 것이다.

2024년이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힘겨웠던 모양인지, 우리는 그해의 마지막 대화들을 유독 더 뜨거운 고백들로 채웠다. 평소에는 세상 쿨하게 굴던 사람들이, 네 덕에 올 한 해 버틸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네가 너무 좋다, 우리 내년에는 더 자주 보자, 사랑한다 같은 다정하고 상냥한 텍스트를 잔뜩 남겼다. 2025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1년 전 기록들을 돌이켜보며 “그땐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간지럽게 말한 거야, 이젠 아냐!”라며 한껏 쑥스러워하며 발랄하게 웃을 수 있기를, 그 정도로 한 해가 신나게 금세 흐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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