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트렌드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프로야구 정규시즌 순위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야구장은 다시 열기로 가득합니다. 그 중심에 20대 여성 팬들이 있습니다. 주말마다 매진을 기록하는 구장에서 유니폼을 맞춰 입고, 굿즈를 사기 위해 줄을 서며,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죠.
물론 야구에서 젊은 여성 팬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 야구 사상 첫 금메달을 딴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관심이 높아지며 여성 관객층이 꾸준히 확대된데다, ‘최강야구’ 같은 스포츠 예능의 인기로 신규 팬들도 자연스럽게 유입됐죠. 하지만 지금 야구장을 채우고 있는 20대 여성 팬들은 단순히 ‘많아졌다’는 수치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야구를 감정과 취향으로 읽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콘텐트로서 소비하고 있으니까요. 이번 비크닉에선 그 현상과 배경을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야구 없는 주말은 상상할 수 없어” 루틴이 된 야구

KBO 사무국에 따르면 2024 시즌 여성 관중 비율은 48%를 넘어섰고, 이 중 20대 여성은 약 30%를 차지합니다. 숫자가 아니더라도 SNS, 예매 플랫폼, 유튜브 채널 등 이들의 존재는 뚜렷이 드러나고요.
7월 말 폭염 속 잠실야구장을 찾은 직장인 석다윤(24)씨는 “처음엔 친구 따라 야구장을 찾았지만, 지금은 ‘야구 없는 주말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유니폼을 입고,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재미로 직관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깊고 지속적인 일상의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좋아하는 선수의 플레이를 숏폼 영상으로 만들고, 경기장의 순간을 포토카드처럼 저장해 공유하는 식이죠. 여기에 누군가는 마스코트 키링과 포토카드 바인더를 모은다거나, 유니폼을 리폼한 에코백을 직접 만들어 메고 다니기도 합니다. 20대 여심은 야구 안에서 자신만의 감성과 취향을 만들어가고 있는 거죠.
브랜드가 주목한 20대 여성의 팬심

이 변화를 가장 빠르게 감지한 건 브랜드입니다. 취향 소비라는 대세 속에서 이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거죠. 지난해 KBO가 야구장을 찾은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20대 여성 팬들이 응원팀 용품에 지출한 연평균 금액은 약 23만7000원으로, 전체 관람객 평균 23만5000원보다 높습니다. 이런 구매력에 힘입어 올 7월 CJ온스타일은 구단 마스코트를 형상화한 ‘오덴세XKBO피규어 텀블러’를 출시해 완판을 기록했고, 세븐일레븐은 ‘2025 KBO 콜렉션 카드’로 380만 팩 이상을 판매하며 품절 대란을 일으켰습니다. 세븐일레븐 관계자는 “포토카드를 수집하고 교환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놀이문화가 됐고, 이는 세븐일레븐만의 시그니처 마케팅이 됐다”고 설명합니다.
또 브랜드는 야구장을 단순한 광고판이 아닌, 감정과 취향이 연결되는 ‘체험형 콘텐트 플랫폼’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AXA손해보험, 로보락, 한국타이어, 스타벅스 등은 체험 부스와 전용 응원존을 운영하며 브랜드를 야구장 경험 속으로 녹이고 있죠. 마케팅 면에서 결과도 성공적입니다. 실제 지난해부터 총 84일간 야구 구단 팝업스토어를 진행한 현대백화점의 경우, 일반 패션 팝업보다 55% 높은 일평균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20대 여성 팬의 ‘화력’은 구단들의 전략도 바꿔놓았습니다. LG 트윈스는 “이들 취향과 공감대를 반영한 인기 IP와의 콜라보, 유니폼 굿즈를 기획하고 있다”며 “팬이 야구장에서 취향을 표현하고, SNS에 기록하며, 브랜드를 체험할 기회를 얼마나 제공하느냐를 중요한 과제로 보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LG 트윈스는 ‘헬로키티’‘최고심’‘블루밍테일’, TXT의 ‘뿔바투’ 등 20대 여성이 선호하는 인기 캐릭터와 협업해 트렌디한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KIA 타이거즈의 ‘티니핑’, 두산 베어스의 ‘망그러진 곰(망곰)’, 한화 이글스의 ‘꿈돌이’처럼 각 구단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캐릭터 팬층까지 아우르며 팬덤을 확장하고 있죠.

야구장의 환경 자체도 20대 여성층을 끌어당기는 ‘경험’에 맞춰 변하고 있습니다.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는 수영을 하며 경기를 볼 수 있는 ‘인피니티풀’이 마련돼 있고, 수원 KT위즈파크와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선 고기를 구워 먹는 ‘캠핑 직관’이 가능합니다. 잠실야구장은 여름을 맞아 경기 중간에 물대포를 맞으며 응원할 수 있는 워터페스티벌이 열리죠.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야구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감정과 취향이 오가는 콘텐트로 바뀌고 있다. 응원과 굿즈, 인증 문화까지 결합되면서 야구장은 이제 루틴이자 놀이 공간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최근에는 여성 화장실 확충, 먹거리 다양화 같은 실질적인 변화도 눈에 띕니다. 귀여운 굿즈를 사고, 음식을 고르고, 인증샷을 남기고, 응원으로 마무리하는 이 풀코스는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드문 ‘가성비 좋은 엔터테인먼트 패키지’로도 통합니다.
야구, 라이프스타일이 되다

20대 여성들이 야구에 몰입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나 화제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최근엔 ‘아이돌 덕질하듯 야구 본다’는 편견을 깨듯 적극적으로 룰을 익히고 데이터를 찾아보며 전문성을 키우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경기 분석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나, 데이터 기반 콘텐트를 만드는 여성 크리에이터가 연이어 등장하기도 합니다. 3년차 키움 히어로즈 팬 박은영씨(26)는 “처음엔 야구를 ‘겉으로만 좋아하는 패션팬, 야알못’으로 오해받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며 “그래서 룰을 더 공부하고 경기를 챙겨보다 보니, 어느새 야구는 삶의 일부가 돼 있었다”고 말합니다.

왜 다른 스포츠보다 야구인가 하는 궁금증은 ‘20대 여성에게 딱 맞는 몰입 구조’라는 점에서 해소될 수 있습니다. 느긋한 경기 템포, 매일 열리는 일정, 그리고 신나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응원가까지 3박자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죠. 또 팀마다 다른 응원 문화는 새로운 재미이자, 팬이 되는 첫 관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몰입은 점점 루틴이 됩니다. 직관은 주말의 고정 일정이 되고, 응원가는 출근길 플레이리스트에 자연스럽게 섞이죠. 어느 순간, 유튜브 알고리즘도 야구 영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야구는 그렇게 일상 깊숙이 파고들며, 더 이상 단순한 ‘관람 스포츠’가 아닌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한화 이글스 마케팅팀 관계자는 “과거에는 야구단의 모든 마케팅이 경기와 직접 연결돼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만, 이제는 일상 속에서 함께하는 브랜드로 소비될 수 있도록 전략을 바꾸고 있다”며 “한화 이글스는 단순한 스포츠 팀을 넘어, 팬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경험을 설계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 야구는 감정의 여백이 있는 스포츠입니다. 오늘은 지고, 내일은 이기고, 시즌 초 미웠던 선수가 가을야구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죠. 팬은 이 변화무쌍한 서사에 자신을 이입시키며 감정을 나누고, 일체감을 경험합니다. 울산에서 태어나 롯데를 응원하는 야구팬 이소윤(25)씨는 “야구가 주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이다. 나만을 위해 달려야 하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경험이 오히려 내 삶을 더 즐겁게 만든다”며 “야구가 시작되는 저녁이면 나도 팀의 일원이 된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보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20대 여성 팬들에게 야구는 일상을 채우는 루틴이자, 감정을 발산하고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관람을 넘어선 콘텐트 소비, 응원과 기록을 통한 감정의 공유. 이들은 지금, 야구를 해석하고 살아내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감정과 취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