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의 공식, 화혼양재

롤랑 바르트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이다. 이 둘은 일본을 여행한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에 관한 에세이집을 출판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의 책 속에서 서양문화의 대극으로 전제된 일본인과 일본문화를 풀어내는 그들의 언어는 일본과 유럽문화 사이의 차이를 즐기는 데 시종한다. 그들의 화려한 개인기 속에서 ‘실체로서의 일본’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다. 그럼에도 레비스트로스의 책 속에서 접한 다음과 같은 지적은 의미 있는 생각 거리를 제공해준다. 그가 관찰한 바로는 외국으로부터 일본에 들어와서 정착한 것들 중에서 본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과거에는 중국을 모방했고, 근대 이후에는 유럽과 미국을 모방해 왔음에도 그 모방에 의한 산출물은 그 어느 나라의 것과도 비슷하지 않다는 견해다.
일본 혼 살려야 한다는 집단의식
승리 지상주의 ‘스몰볼’ 야구 발전
학문도 순혈 따져 토종 학자 중시
노벨상 27명 중 24명이 일본 학위
자주성 지키려는 화혼양재 이념
극단화한 형태가 태평양전쟁

11세기 중국 받아들일 땐 화혼한재
이 말을 달리 풀이하면 일본인들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문물을 자국문화와의 친화성을 고려해 현지화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대목에서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이 떠오른다. 일본 고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에서 전래한 학술·기술을 활용한다는 의미다. 즉, 화혼양재는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서양문물 수용에 대한 심리 패턴, 혹은 집단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일본에서 11세기께부터 일본의 문헌에 등장해 식자들 사이에서 사용된 화혼한재(和魂漢才)라는 말이 있었다. 중국 문명의 압도적인 영향 속에서도 일본 고유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이념이 담긴 표현이다. 화혼양재는 화혼한재의 근대 버전인 셈이다. 화혼양재는 비슷한 시기에 조선과 중국에서 회자되었다가 자취를 감춘 동도서기(東道西器)나 중체서용(中體西用)과 달리, 100년을 훌쩍 넘는 시간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며 외래문물과 전통가치와의 관계설정에 대한 암묵적인 집단의식으로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문명화 즉 서양화를 추진했음에도 일본인들은 서양문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양인 성직자들이 기독교의 현지화에 공을 들였지만 유일신을 섬기는 일원론적 세계관이 걸림돌이었다. 현재 가톨릭과 신교를 합한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전체 인구의 1% 미만이다. 대다수 일본인들이 혼합종교 성향을 보이며, 범신론이자 무종교주의에 가깝다.
야구에 접목된 무사도 정신

일본에서 근대 스포츠는 문명개화기에 도입되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구기 종목이 야구였다. 1873년 도쿄대학의 전신인 개성(開成)학교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던 미국인 교사가 처음으로 학교운동장에서 야구를 가르쳤다.
도입 후 60년간 야구는 대표적인 학생스포츠였다. 초기의 일본 야구인들에게는 야구라는 형식에 채워야 할 내용은 무엇보다도 일본적 특질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했다. 여기에 불려 나온 것이 정신주의였다. 구체적으로는 무사도 정신이었다. 그들은 야구를 신체단련이나 기술연마에 앞서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삼았다. 질소검약, 실질강건, 살신성인 같은 덕목을 강조하며 무사도 정신을 접목시켰다. 예의와 규율을 중시했고, 근성과 인내를 강조했다. 개인보다는 집단, 즉 팀을 우선해야 했고, 나아가 야구를 통해 모교의 명예를 높여야 했다. 모교의 명예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승리지상주의가 뒤따랐다. 그리고 모교의 명예가 국가의 명예로 확장하며 근대스포츠 전반으로 확산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승리지상주의는 스포츠 본래의 목적을 왜곡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야구에서 익숙한 희생번트·도루·희생플라이 등으로 점수를 내는 ‘스몰 볼’은 스포츠의 재미보다는 오로지 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야구도 일본식으로 토착화해 국기(國技)가 되었다. 무사도 야구를 표방했던 학생야구에 뿌리를 둔 일본의 프로야구는 5년 연속 세계랭킹 1위이고, 국제대회에서도 세계 정상급의 성적을 올린다. 노모 히데오,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오타니 쇼헤이 같은 일본 선수들은 뛰어난 기량으로 메이저리그를 평정했다. 2023년 WBC 결승에서 일본이 야구 원조인 미국을 상대로 승리했을 때 일본국가대표팀은 메이지 시대 무사도 야구의 후예답게 ‘사무라이 재팬’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시상대에 올랐다.
일본이 강한 것은 야구만이 아니다. 매해 10월이 되면 발표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서 일본인 이름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올해의 2명을 포함해서 노벨상 3개 과학부문에서 모두 27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2000년 이후 수상자 수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이다. 위키피디아에 의존해서 일본인 수상자 27명의 경력을 알아봤다. 27명 중 24명이 학부와 석·박사를 모두 일본에서 마쳤고, 나머지 3명은 일본의 대학에서 학·석사를 마친 후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외한에게는 놀라운 결과였다. 노벨상 시상식에 출석하기 위해 평생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는 교수도 있었다는 후일담도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2010년 전후 10년 동안 일본의 국립대학 교원의 이력을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외국 학위를 가진 일본인 대학교수의 숫자는 전체의 2.8%였다. 사립대학 역시 5% 미만이었다.
토종 지향의 지적 생태계
가히 쇄국적 고립 상태라 할 만한 수치와 그간의 학문적 성과를 함께 놓고 보면 일본의 대학은 진화를 멈춘 갈라파고스가 아니라 오히려 지적 생명력이 넘치는 기적의 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위의 수치와 통계가 놓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비록 학위 취득 경력 속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당사자가 실제로 구미대학에 유학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즉 많은 일본인들이 1년에서 2, 3년 정도의 유학을 하지만 현지 대학에서 학위까지 취득하는 경우는 드물다. 도쿄대·교토대와 같은 엘리트 대학 출신일수록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외국 학위보다는 자국·자교의 학위를 중시하는 순혈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혼양재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작가 모리 오가이는 서양 학문을 배울 때 한쪽 발은 언제나 모국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일본의 마음으로 서양을 배우는 것은 문명개화기 이후 일본 지식계의 큰 흐름이었다.
여러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국어로만 과학을 학습하고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이 노벨상 수상의 영광으로 이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만큼 깊게, 긴 호흡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스승의 연구주제를 물려받아 노벨상을 받은 연구자도 있었다. 본디 일본의 장인문화는 베스트 원이 아닌 온리 원을 추구했다.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200여개의 번으로 나뉜 막번 체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화이다. 화혼양재 이데올로기는 서양과의 우열구도 속에서 자국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정신적 진지였다.

화혼양재 이데올로기가 공격적인 국수주의의 형태를 띠며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은 태평양전쟁 시기였다. 영 단어가 배척되었고, 일본어로 대체되었다.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정신적·도덕적 우위를 주장하며 귀축미영(鬼畜米英)을 외쳤다.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허리춤에 묵직한 일본도를 패용한 가미카제 공격대 조종사가 귀환할 연료도 싣지 않은 제로 전투기에 올랐다.

물론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화혼양재라는 맥락만으로 소상히 파악할 수는 없다. 양혼양재, 또는 화혼화재, 양혼화재 등의 의미범주가 중층적으로 겹쳐있는 사회문화 현상이 있을 수 있고, 분절된 단어의 배열을 각각 달리해서 접근해야 할 경우도 있다. 어찌 되었거나 이러한 논의를 통해 공유할 수 있는 바는 화(和)와 양(洋), 즉 일본과 서양으로만 구성된 이원론적 세계관이 근대화 과정의 일본인들에게 폭넓게 내재되었다는 씁쓸한 사실 인식이 아닐까 싶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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