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10일은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76년이 되는 날이었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것은 두 차례의 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행된 집단학살 등을 겪으며 인권이야말로 이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장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언문의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격분시키는 만행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세계인권선언일로부터 일주일 전 시민들은 또 다른 만행을 목격했다. 바로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비상계엄 선포와 그 후 나온 계엄사령부 포고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를 준수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내용도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담고 있었다.
포고령 1호가 전면 금지한 것이 정치적 집회·결사의 자유였는데, 계엄군을 막고 계엄 해제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의 집회였다는 것은 의미 깊다. 모이고 말하며 이를 통해 정치를 만들어나가는 것,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집회·결사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인 힘들은 끝내 14일 윤석열의 탄핵소추 의결을 이끌어냈다.
계엄을 해제시키고 10일 만에 탄핵안 가결이 성사되기까지, 시민들이 모인 광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성장한 것은 단지 모인 시민들의 숫자만이 아니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기 시작했고, 집회 시작 전 안전하고 평등한 공간을 만들고 혐오 발언을 배제하자는 약속문을 함께 읽는 모습들은 2016년 촛불집회 때와는 다른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광장의 풍경을 바꾼 것은 이번부터 소수자들이 기특하게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인, HIV 감염인, 이주민 등은 언제나 광장에 있었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해왔다. “폭주하는 남성성의 시대를 끝내자” “성소수자 차별도 윤석열도 없는 사회”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광장에서도 꾸준히 들려 온 다양한 외침을 이제야 사회가 주목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후의 정치는, 사회는 달라져야 한다. 앞으로 탄핵 심판이 진행되고 결론이 나온 후에는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것이다. 이미 드러난 사실로도 비상계엄이 철저한 계획하에 헌법기관을 무력화하고 인권을 짓밟으려는 헌법 파괴 행위임이 자명한 만큼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의 사태는 단지 한 명의 폭주 정치권력이 만든 결과물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폭주가 가능하게 한 법과 제도, 그리고 오랫동안 쌓여 온 극우정치가 만든 비극이다. 그러한 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인권을 무시하는 만행은 또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
헌법상 평등권을 두텁게 보장하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구조적 성차별을 끝내고 딥페이크 등 성범죄에 제대로 대처하라, 모든 사람이 서로의 관계를 인정받기 위해 혼인평등을 실현하라, 장애를 이유로 시설에 갇히고 이동하지 못하는 차별을 없애라. “윤석열 탄핵”을 외친 소수자 시민들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요구들이다. 각양각색 응원봉만큼이나 다양하게 빛나는 이 요구들이 이젠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한 열망을 담아 인권운동단체들이 12월10일 공동기자회견에서 발표한 회견문 일부를 소개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를 담보하지 못하는 체제는 언제나 시민불복종으로 새 역사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지금 이 시대의 ‘질서’를 제시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정치권력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사회를 향하는 우리의 투쟁이다. ‘우리의 오늘이 내일의 미래를 여는 약속’임을 알기에, 인권운동 역시 인간다운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투쟁에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