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최상목은 두뇌 회전이 빠르다. 명문대 출신에 머리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관료 조직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지난달 30일 일요일 오후 최상목이 갑자기 10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안을 들고나왔다. 미국 국채 보유 사실이 들통나 수세에 몰린 뒤 취한 첫 행동이었다. ‘디테일’은 추경의 규모에 있었다. 야당은 지난해 하반기 이후 줄기차게 30조원 이상을 주장했다. 대형 산불이 나기 전에도 최소 15조~20조원 필요하다는 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분석이었다. 야당은 셈이 복잡해졌다. 액수가 적지만 정부가 추경을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돌아선 게 어딘가. 그러나 최상목의 추경안은 먹기엔 양이 적고, 버리기엔 아까운 ‘계륵’이었다. 그렇게 최상목은 자신에 대한 비난 여론을 희석하고, 추경 지연과 민생 악화 책임을 야당에 떠넘기는 일석이조의 신공을 보여줬다.
이런 최상목도 국무총리 한덕수보단 한 수 아래다. 탄핵 정국 초기 최상목은 상관인 한덕수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한덕수는 헌법재판관 3명 임명 건을 미루고 야당을 자극해 국회의 탄핵소추를 사실상 유도했다. 헌정질서를 바로잡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할 대통령 권한대행의 교묘한 책임 회피였다. 권한대행의 탄핵소추 의결 정족수도 대통령과 같은 200석 이상이라고 주장하며 한덕수가 버텨줄 것으로 국민의힘은 기대했다. 그러나 한덕수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오리무중 정국에 ‘잘해야 본전’인 권한대행 자리를 애써 지킬 이유가 없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물러났고 뒷감당은 최상목 몫이었다.
시간이 지나 내란 세력이 결집하고 자신의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이 기각되자 한덕수는 개선장군처럼 복귀했다.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12·3 내란 사태를 미리 막지 못해 죄송하다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다. 근엄하게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더니 요즘은 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하다. 지난 1일엔 이재용·최태원·정의선·구광모 등 4대 그룹 총수들까지 불러모았다. 어려운 책무는 피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야당의 탄핵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대중들에겐 중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풍기는 한덕수. 올림픽에 ‘처세술’을 겨루는 종목이 있다면 정권을 넘나들며 50여년 꽃길만 걸은 한덕수는 단연 금메달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것은 극한직업이다. 헌재의 윤석열 탄핵심판 선고가 지연되면서 온 국민이 밤잠을 설치고 있다. 그러나 한덕수와 최상목에겐 고뇌가 보이지 않는다. 권력 공백기에 최고 권좌에 앉은 이들은 말로만 ‘국민’ ‘헌법’ 운운할 뿐 행동은 정반대다. 국회 선출 헌법재판관을 권한대행이 임명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헌재가 분명히 밝혔는데도 지금껏 마은혁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고 있다. 옳고 그름이 뻔히 보이는데도 양비론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으면서도 중립을 지키는 척한다. 권한대행으로서 해야 할 직무는 유기하고, 정작 하지 말아야 하는 일에선 직권을 남용하면서, 국가 시스템을 박살 내고 삼권분립을 허물고 있다. 국회가 통과시킨 ‘내란 특검법’은 헌법상 권력분립 원칙을 위반하고 실익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걷어찼고, 국민 다수가 지지한 김건희·명태균 특검법도 거부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부터 상법 개정안까지 권한대행 체제 3개월여 동안 이들이 행사한 거부권(재의요구권)만 16번이다.
경제와 민생이 누란의 위기다. 성장률 쇼크는 기정사실로 굳어져 급기야 0%대 전망까지 나왔다. 미 트럼프 정부의 관세·비관세 압력은 기업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그러나 경제부총리·주미대사·무역협회장 등을 역임한, 자칭 통상 전문가 한덕수는 지금까지 미국 수뇌부와 통화했다는 소식이 없다. 고환율로 난리인데 최상목은 환율 상승에 베팅해 미 국채를 2억원어치나 매입해 보유 중인 사실이 드러났다.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폭등해도 금융시장에 구두개입 한마디 할 자격이 없는 경제부총리가 무슨 소용인가.
늙은 말의 지혜로움을 의미하는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고사성어가 있지만, 공직 경력이 각각 55년과 39년인 엘리트 관료 한덕수와 최상목은 개인 잇속만 차리며 국민과 나라를 벼랑으로 끌고 있다. 망상에 사로잡혀 나라를 나락에 빠뜨린 내란 수괴 윤석열도 나쁘지만, 제정신인 한덕수와 최상목은 더 나쁘다. 양심과 도덕, 책임감과 애국심이 없는 관료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국민은 지난 4개월 한덕수와 최상목이 한 일을 알고 있다. 이들을 그냥 두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