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국제적으로 ‘백신 비접종 구제역 청정국’으로 분류된다. 세계동물보건기구(WOAH)는 구제역이 2년간 발생하지 않으면 청정국으로 인정해준다. 일본은 2010년 크게 홍역을 치른 이후 지금껏 구제역을 막아왔다. 더욱이 백신접종을 하지 않고도 청정국 지위를 확보한 것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정작 백신접종을 의무화하는 우리나라는 1년10개월 만에 구제역이 재발하면서 ‘청정국 문턱’ 앞에서 분루를 삼켜야 했다. 일본이 잘하는 것은 무엇이고 한국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본지는 일본 남부 후쿠오카를 찾아 지방자치단체 중심의 가축전염병 대응체계와 농가 방역을 이끄는 수의사의 역할, 농가 방역의식 수준을 살폈다.
◆지자체 중심으로 가축전염병 대응=일본에서 마지막으로 구제역이 발생한 해는 2010년이다. 일본 규슈 남동부 미야자키현에서만 1339농가의 소·돼지 29만마리를 살처분했다. 그 탓에 2350억엔(2조2520억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 이후 15년이 넘도록 구제역이 터지지 않고 백신접종도 하지 않는 청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답은 지자체를 중심으로 한 촘촘한 가축질병 대응체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현(県)에서는 방역 종사자와 방역 자재 확보, 살처분 매각 후보지 등을 알선하는 역할을 한다. 하위 행정단위인 시정촌(市町村)에서는 매립지 선정에 필요한 주민 동의 획득, 소독 거점 운영 지원을 맡는다. 축산관계단체는 시정촌 역할을 보조하도록 돼 있다.
본지가 입수한 ‘미야자키현 구제역 방역 매뉴얼’을 살펴보면 일본은 현 중심의 행정체계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인다. 중앙부처가 각 지자체에 방역지침을 내리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방역 권한의 상당 부분이 지자체에 위임된 모습이다. 현 지사는 가축전염병이 발생하면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고, 중앙부처와 협의해 백신접종과 예방적 살처분 가운데 어떤 조치를 취할지 결정한다.
국내 광역자치단체 방역 관계자는 “가축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대처 주체가 중앙부처인지 지자체인지에 따라 일장일단은 있다”면서도 “지자체가 중심이 됐을 땐 지역에 맞게 효과적으로 초동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했다.
◆수의사가 개별 농가방역 책임져=“당연히 수의사만 할 수 있죠!” 가축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확산을 막고자 백신접종은 누가 관리하느냐는 질문에 후카미즈 다이 후쿠오카현 유통가공과 가축위생계장은 이렇게 답했다.
지난해 11월 후쿠오카시에서 ‘럼피스킨’이 터졌을 당시 백신접종 대상은 19농가, 소 8000마리에 달했다. 이때 5명 내외의 수의사가 하루에 100마리씩 접종하며 질병 확산 방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일본엔 ‘수의사 농가 책임제’가 정착된 지 오래다. 수의사가 축산농가를 전담해 백신접종은 물론 방역시설 점검을 포함한 농가 방역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관리해준다.
후카미즈 계장에게 “최근 한국 전남지역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소규모 농가는 공수의사가 백신접종을 해주고, 대규모 농가는 자율 접종하도록 했다”고 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일부 농가에선 백신 부작용을 의식해 접종을 꺼리지 않나요? 농가 자율에 맡기는 것은 위험합니다. 수의사에게 농가 내 가축전염병을 관리하게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리 현에선 아예 농가가 수의사 접종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해당 조례를 개정할 계획이고요.”
◆농가들도 방역 위해 외국여행 자제=일본에선 ‘백신 만능론’을 경계하는 분위기도 비교적 뚜렷하다. 후쿠오카현 농림수산부 관계자는 “수입한 백신의 질병 예방률이 그리 높지 않은 데다 지속해서 사용하면 예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바이러스 변이가 생겨 ‘질병 발생 초기에만 집중해서 백신을 접종하고 종식이 되면 백신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고 했다. 백신 사용이 오히려 자국 축산물의 대외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사고방식도 한몫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한수의사회 관계자는 “백신접종이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자국에 상존한다는 걸 국제적으로 알리는 꼴이 된다고 생각해 일본은 최대한 자제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현지 농가의 방역의식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수의사협회 관계자는 “농가들은 가축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아프리카돼지열병(ASF)·구제역 같은 질병이 많이 발생하는 나라는 ‘관광 목적’으로도 방문하지 않는다”면서 “특히 외국에 다녀오면 5일간 가축과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규칙을 철처히 지킨다”고 말했다.
축사 내 공간 구획도 효율적으로 짠다. 주변에 전기 울타리(펜스)를 치는 것은 기본이고, 출하차량이나 사료차는 외부에 따로 대기공간을 마련해 전염병 유입을 차단한다. 후쿠오카의 한 돼지농장주는 “농림수산성에서 만든 ‘농장 위생관리 표준화 매뉴얼’의 지침이 워낙 세세해 인근 농장끼리 형태가 엇비슷하다”며 “축산업에 처음 뛰어든 사람이라도 매뉴얼만 잘 익히면 축사 시설도 어렵지 않게 배치할 수 있다”고 했다.
후쿠오카(일본)=이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