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의 아침은 차례를 지내며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을 만났다. 감사와 서로 아끼며 살겠다는 절을 올렸다. 과거에 미련 두지 말고, 미래를 불안해 말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추석의 오후는 장모님을 중심으로 친지들의 환담, 윷놀이와 시상, 장모님의 당부 말, 식사로 보냈다. 그동안 못 본 이들 간의 이런저런 이야기, 아이들의 천진무구한 행동을 보며 웃는 소리, 휘젓고 다니는 아이들 쫓아다니기로 떠들썩했다. ‘미시즈 코리아’ 대회가 있다면 입상이 확실한 건강미를 유지하고 있는 90이 훨씬 넘은 장모님(여성의 나이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실례다)은 증손자, 증손녀를 합해 30명에 가까운 가족에게 자신이 없는 날이 오더라도 자주 만나라고 당부하셨다.
저녁은 품격 있는 가왕 조용필의 콘서트가 사람들에게 횡재 같은 위로를 선사했다. 먼 외국 땅, 병상, 주방, 일터, 골방 등 외롭고 거친 삶의 곳곳에서 달려온 남녀노소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껑충껑충 뛰고, 얼싸안고, 눈물 흘리며 혼연일체가 되었다. 나도 눈물이 나오는 걸 아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물은 슬플 때만 흘리는 게 아니고 기쁠 때도, 화가 날 때도, 성취할 때도, 아쉬울 때도 나오는 것임을 실감했다.
추석의 모습은 변해가고 있다. 부모님과 고향을 찾아 하루를 길 위에서 보내는 가족도, 국내외 휴양지에서 지내는 가족도 있다.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혹사, 식구들 간의 갈등,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에 따른 명절 철폐 논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천차만별의 변화가 오더라도 추석날에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와 사랑이 꽃피는 모습은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
75세의 가왕은 ‘바람의 노래’라는 곡에서 꽃이 지는 이유, 나를 떠난 사람, 만나게 될 사람, 인연과 그리움이 가는 곳, 피할 수 없는 실패와 고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 그 모든 것의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라고 노래했다.
법정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이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피어난다.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피어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산에는 꽃이 피네’). 헤르만 헤세는 ‘가을’에서 “함께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머지않아 우리는 먼지가 되리니”(‘홍성광)라고 인간 존재를 직시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참 맞고 참 좋은 말이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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