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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열세 살에 중국 만주 위안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해방을 맞은 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강제로 불임 시술을 당해 아기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누구에게도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했던 길 할머니는 일흔한 살이 돼서야 용기를 냈다. 과거 자신이 겪은 참혹한 실상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그는 1998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한 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알리는 활동에 힘을 쏟았다. 수요시위와 일본 순회 집회에서 수차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12년에는 김복동 할머니 등과 함께 세계 전쟁피해 여성을 돕기 위한 ‘나비기금’을 만들었다. 길 할머니가 어렵게 꺼내놓은 증언들은 음악과 책이 됐다. 2017년 ‘길원옥의 평화’라는 음반이 나왔고, 이듬해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라는 소설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요시모토 하나코, 군인들이 나를 그렇게 불렀어”라며 그 이름이 안 잊힌다고 했다.
길 할머니가 지난 16일 노환으로 먼 길을 떠났다. 생전에 노래로 시름을 잊던 그가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붙들고 있던 기억은 두 개였다고 한다. ‘평안북도 평양시 서성리 76번지 26호’라는 고향 집주소, 중국으로 떠나던 날 “누나- 빨리 갔다 와”라고 외치던 남동생의 목소리다. 고향 땅을 밟고,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던 바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일본의 진정한 사죄로 할머니들의 상처에 앉은 더께를 털어내는 일은 여전히 멀다. 올해는 한·일 양국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의사에 반하는 ‘12·28 위안부 합의’를 체결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위안부 할머니는 이제 일곱 분 남았다. 하지만 일본의 사죄는커녕, 수요시위마저 극우단체의 집회 장소 선점으로 인해 장소를 바꿔 열고 있다. 꼬부랑 할머니가 돼 떠나는 그의 마지막 걸음이 편친 않겠다.
언젠가는 수요시위가 막을 내리는 그날까지, 성노예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난 빈자리는 이제 남은 이들의 책임이 됐다. “하늘나라에도 군인이 있을까. 군인이 있는 데면 나 안 갈래.” 할머니의 이 말에 코끝이 찡해진다. 그가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