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1월 8일,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호로비츠의 미국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공연이 열렸다. 당시 나이 75세. 최난도의 작품과 맞서기에는 너무 고령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호로비츠는 용감하게 도전했다. 그의 예술 인생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의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50년 전인 1928년 1월 12일, 스물다섯의 호로비츠는 토머스 비첨 경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카네기홀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그 자리에 라흐마니노프가 와 있었다. “자네의 옥타브는 굉장히 빠르고 시끄러웠지만, 그리 음악적이지는 않더군.” 그게 라흐마니노프의 평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젊은 호로비츠의 열망과 절박함도 보았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그래서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말이다.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관대하게 자신처럼 망명객이 된 젊은이를 끌어안았다. 호로비츠 또한 사석에서 작곡가와 함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포핸즈로 연주하면서 그의 인품과 예술성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1978년의 연주는 다르다. 물론 손가락은 세월을 거스르지 못했고 불꽃 같은 타건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속주도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존경, 작품에 깃든 사랑과 추억만큼은 악상에 고스란히 담겨 매 순간 노스탤지어를 물씬 풍긴다. 아마도 라흐마니노프가 이 연주를 들었다면 함께 호흡하고 즐거워하고 또 안타까워하며 그러나 결국에는 “이제야 음악적이 되었다”며 그 드문 미소를 환하게 보내주지 않았을까.
1978년에 임윤찬 군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음반을 “천 번이나” 들으며 라흐마니노프의 세계를 빨아들였다고 한다. 기교 너머의 음악성이란 무한한 세계다. 그 속에 잊힐 수 없는 만남, 단 한 번뿐인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