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리가 아파 병원을 찾은 생후 15개월 A양의 허벅지에서 커다란 종양이 발견됐다. 하지만 여러 병원의 의료진이 조직검사 등 각종 검사를 해봐도 정확한 병명을 찾아내지 못했다. 거듭된 검사에도 진단을 내리는 데 실패했고, 결국 A양에게 내려진 진단명은 그저 ‘악성 종양’이었다. 진단이 구체적이지 못하니 제대로 된 치료도 불가능했다.
그랬던 A양이 ‘이건희 소아암 극복사업’에 참여하면서 희망이 생겼다. 이 사업을 통해 인체의 모든 유전 정보를 해독하는 유전체 전장 검사를 받아보니, 매우 희귀한 유전자 변이를 가진 백혈병의 아형으로 나타났다. 고형암(혈액암을 제외한 암) 형태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혈액암이었다는 얘기다. 정확한 진단을 받고 나니 치료에 희망이 생겼다.
지난 5일 서울대 의과대학 융합관에서 열린 ‘소아 고형암 정밀의료사업’ 심포지엄에서는 A양의 사례를 비롯해 이 사업이 지난 2년간 이룬 성과가 발표됐다. 사업을 이끄는 피지훈 서울대병원 소아신경외과 교수가 발표를 마치자 심포지엄에 참석한 해외 연구자들은 “2년 만에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는 반응을 내놨다.
소아암은 성인 암과 달리 환자 수가 적어 치료는 물론 진단조차 쉽지 않다. 워낙 희귀해 연구가 그만큼 진전되지 못한 탓이다. 이런 한계를 깨기 위해 국내 연구자들이 '소아 고형암 정밀의료사업', 이른바 ‘STREAM(Strategic Treatment And Magic for pediatric cancers)’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이 사업은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유족이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에 써달라며 기부한 3000억원을 재원으로 2023년 본격화됐다. 소아 고형암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개인별 맞춤 치료를 해내는 게 최종 목표다.

여러 병원에 흩어져있던 소아 고형암 환자들의 유전체 데이터를 한데 모아 분석하는 게 첫걸음이었다. 서울대병원을 중심으로 삼성서울·세브란스·서울아산병원 등 7개 병원이 뭉쳤다. 이들 병원을 통해 2년 반 동안 사업에 등록한 환자 수는 700여명에 이른다. 매년 한국에서 발생하는 소아 고형암 환자가 500명 안팎임을 고려하면, 절반 이상이 참여한다는 얘기다. 내년 5개 병원이 더 합류하면 신규 환자의 70%까지 사업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피지훈 교수는 “선진국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연구사업을 하고 있지만, 자국 환자의 절반 이상이 참여하는 데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이 정도 규모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건 쉽지 않은데, 이건희 기금 덕분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A양의 사례와 같은 성과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과거 국내에는 아예 없는 줄 알았던 특정 암 유발 유전자를 등록환자의 약 10%에서 발견했다. 피 교수는 “옛날 같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환자 몇십 명을 진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심포지엄에 참석한 해외 전문가들은 연구 진전 속도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캐나다 토론토 어린이병원의 뇌종양 전문가인 애니 황 교수는 “비슷한 프로그램을 10년째 운영 중인데, 한국은 불과 2년 만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다”라며 “이미 최첨단 단계”라고 평가했다. 호주 ‘제로(ZERO) 소아암 프로그램’을 이끄는 폴 에커트 교수는 “소아암은 너무 희귀해서 한 나라의 데이터만 봐서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며 “짧은 기간 안에 이 정도로 발전한 한국과 더 많은 경험과 데이터를 공유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소아암 연구에 민간 기부금이 미치는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애니 황 교수는 “정부는 보통 효과가 이미 입증된 연구에만 자금을 지원한다”며 “성과를 증명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연구자에게는 우릴 믿어주는 민간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STREAM 사업의 다음 목표는 치료율 향상이다. 피지훈 교수는 “정확한 진단이 첫 과제였다면, 이제 치료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며 “소아암 분야는 임상시험에 제한이 많아 약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 검증된 약제들을 환자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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