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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를 앞두고 텃밭의 생울타리를 손보기로 했다. 생울타리는 밭의 경계에 심어진 나무들을 말하는데, 가지치기를 하기 위해 나는 톱과 전정 가위를 들고 나섰다. 큰 나뭇가지는 톱으로 자르고, 잔가지들은 전정 가위로 베어내려고.
생울타리는 생명의 통로이다. 텃밭 가엔 꽤 여러 종의 나무들이 있다. 보리수나무·싸리나무·붉나무·목단·꾸지뽕나무·산사나무·아로니아나무 등. 이런 나무들로 이루어진 생울타리는 꽃과 향과 열매로 다른 생명들을 불러들인다. 텃새나 철새는 물론 나비, 꿀벌, 갖가지 곤충들이 생울타리를 찾아 휴식을 취하고, 먹이를 구하고, 깃털을 손질하고, 둥지를 지어 알을 낳기도 한다.
새·곤충 휴식처, 잡초 더부살이
황무지 녹화 두 남자 다큐 감동
농업 산업화되지만 소농은 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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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식물들도 기대어 살아갈 수 있는 생울타리. 특히 덩굴식물들은 생울타리를 타고 올라가 한살이를 꾸리기도 한다. 환삼덩굴이나 돌콩, 인동초 같은 흔한 식물들이 생울타리에 기대어 더부살이를 하는 셈. 야생초를 식용하는 우리 가족은 이런 식물들도 아낀다. 하지만 고소득을 목표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겐 이런 식물들은 천덕꾸러기 잡초로 여겨져 박멸의 대상일 뿐. 따라서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생울타리는 사라지고 밭의 경계를 철망 같은 것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생울타리는 나처럼 소농을 꾸리는 사람에게 먹거리를 줄 뿐만 아니라 땔감도 준다. 전정을 끝낸 후 난 생울타리 밑에 흩어진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처마 밑에 쌓았다. 잘 말려서 불쏘시개로 쓸 작정이다. 일을 다 마친 후 따끈한 차를 마시며 쉬는데, 얼마 전 한 다큐에서 본 황무지 땅에 나무를 심던 이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중국 허베이성의 예리촌에 살던 두 남자의 감동적인 실화.(‘길 위의 인생: 나무와 두 남자’)
주인공인 50대 중반의 남자 쟈원치는 두 팔이 없이 살아가고, 그 친구인 쟈하이샤는 젊을 때 채석장에서 폭파작업을 하다 실명을 당해 앞을 보지 못한다. 쟈하이샤는 이 사고를 당한 후 죽으려고 했지만, 도시에 나가 살다가 연로한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 쟈원치가 “나는 두 팔이 없어도 산다”며 같이 힘을 보태어 살아보자고 부추긴다.
유쾌하고 긍정적인 성격의 쟈원치는 아름다운 꿈쟁이. 고향 마을의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가꾸는 푸르른 꿈을 꾼다. 불가능한 꿈처럼 보이지만, 두 남자는 보지 못하는 친구의 눈이 되고, 팔이 없는 친구의 팔이 되어 황무지 땅에 나무를 심는다. 묘목 살 돈이 없는 그들은 꺾꽂이가 가능한 수종인 버드나무과의 사시나무 가지를 꺾어 나무를 심는다.
첫해 800그루의 나무를 심었지만, 가을이 되어 두 그루만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쟈하이샤는 포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낙천적인 쟈원치는 내년에도 또 심어보자며 쟈하이샤의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15년 동안 두 사람이 공들여 심은 1만 그루의 나무들은 제법 울창한 숲이 되었다. 그들은 다른 황무지를 찾아 또 나무 심기에 도전한다. 온갖 역경 속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무를 심어온 그들은 자기들의 체험을 통해 터득한 근사한 경구 하나를 툭 던진다. “방법은 고난보다 많다.”
불편한 장애의 몸으로 헐벗은 지구별을 푸르게 가꾸고 싶어 하는 두 남자의 의기투합은 눈물겹고 성스럽다. 두 팔 벌려 기도하듯 하늘을 우러르는 나무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의 수액을 퍼올려 푸른 희망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나무들. 따라서 그들이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자기 삶을 들어 올리는 일이며 자기 영혼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성스러운 일이 아닌가.
지구상의 어떤 나무들은 성스러운 나무로 대접받는다. 붓다가 깨달음은 얻은 인도 보리수나무나 고대 아일랜드의 참나무가 그렇다. 나 역시 산에 들 때마다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자연의 살아 있는 성소(聖所)라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소비 사회에서는 “성스러운 나무와 성스러운 것의 자리가 없다. 그들이 밀려난 까닭은 금전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치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가치이며 영원토록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 『세계숲』)
중국의 두 남자가 황무지에 심어 가꾼 사시나무 숲, 내가 보물처럼 아끼는 텃밭의 생울타리는 ‘금전적 가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의 가치’를 품고 있다. 농업은 이제 천직에서 산업으로 바뀌고 있지만, 소농을 지금도 천직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흙과 나무와 농사일은 삶의 기쁨이고 보람이며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희망이다.
고진하 시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