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년 전에 영국 런던에 태어난 사람과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 산간에서 자란 사람이 같아지지는 못한다. 주어진 시대, 사회적 숙명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에게는 동일성이 있다. 그래도 넘어설 수 없는 운명에 차이가 있다면 그들의 성격이라고 본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주인공들이 잘 설명해 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성격대로 살다가 죽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갖고 태어난 성격은 각자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성격 바꿀 수는 없어도
인간은 시대정신에 속한 존재
공존의 가치와 희망 추구할 때
운명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어

성격이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 큰일을 하고 성공한다. 그런데 노년기가 되고 성공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 그 자만심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타고난 욕망과 명예심 때문에 실패를 자초하는 지도자가 된다. 타고난 본성과 성격 때문이라고 평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존경받고 업적을 남겨 준 지도자 중에서 애국심을 갖고 자신을 억제하며 희생시킬 때는 성공했으나 그 희생정신을 상실한 후에는 욕망의 본성을 극복 못 한 지도자를 보게 된다.
행동을 바꾸면 성격도 바뀌나
그런 타고난 운명 즉 성격을 바꿀 수 있는가. 한때 행동과학 연구가들은 그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학설을 우리나라 기업체 교육에 적응시켜 보기도 했다.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성격을 바꿔라.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는 습관(習慣)을 바꿔라. 습관을 바꾸기는 수월하다. 계속해서 행동을 바꾸면 된다. 행동은 생각을 바꾸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리고 생각은 항상 바뀌게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관찰해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오랜 교육과 자기반성은 물론 노력이 필요한가.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고는 감정과 함께 발생하며 감정은 지성보다도 의욕에 속한다. 그 의욕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의 상태여서 변하지 않는다. 그대로 살다가 끝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행동을 바꾸는 데 영향은 줄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부만 보고 물속에 잠겨있는 더 큰 빙산을 못 보기 때문이다.
살아 보면 나는 그 시대와 사회가 가진 정신계 속에 살다가 그 안에서 끝난다. 시대와 공동체 의식이 곧 개인의 정신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리며 사회적 평가를 받는 것이 인생이다. 생각은 우리가 갖고 사는 사상을 말한다. 그 사상을 독단적으로 창조해서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랬다간 현실을 벗어난 열매 없는 공염불로 그친다. 한때는 유토피아 관념이 성행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현실을 벗어난 정신계의 꿈일 뿐이다.
그러나 그 꿈에 해당하는 정신적 기대와 희망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그에 도전한 사람들이 철학자가 된다. 특히 종교적 이상을 구현하려는 사람이 옛날부터 있었다. 종교가 존속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에 그 대표적인 이상을 남겨 준 종교도 그렇다. 속세를 버리고 자신의 사상이 아닌 우주적 이념에까지 도전했던 불교 지도자가 있다. 기독교도 그 대표적인 신앙적 공동체의 현상이다. 신부가 되고 수녀가 되었다. 수도원이 그 대표이다. 신부·수녀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직자들은 세상의 가치와 사상을 더 높고 영원한 정신적 실재로 현실화하려는 노력을 계승해 왔다. 불교는 현실을 초월한 정신적 가치와 이상을 원했다. 기독교는 그 가치와 이상을 현실 역사와 사회에서 구현시키려는 사명을 견지해 왔다.
그런 종교적 신앙을 갖는 사람은 타고난 성격을 개조할 수 있는가. 성격을 무화(無化)시키지는 못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거듭난다든가,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내 것을 버리고 주어진 교훈과 뜻을 따라 산다는 뜻이다. 석가의 가르침과 뜻에 따라 다시 출발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교훈과 인격을 수용해서 인생을 변화시켜 인생의 목적과 가치가 새로운 희망과 사명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흔히 종교계에서는 그런 사람을 성자라고 칭한다. 그러나 비교적 거룩함의 가치와 삶을 차지할 수는 있으나 완전한 성인(聖人)은 없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들의 노력과 체험을 존중한다. 그러나 타고난 인간의 본성까지는 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존경스럽고 모범이 되는 종교적 가치와 삶을 인간적으로 성취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자족해야 한다. 그들도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 문화적인 사상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격적 자유와 사랑의 가치가 되기를 바란다. 인권과 인간애의 정신적 가치가 인간생존의 기본이기 때문에 종교인이 아니라도 좋다. 그런 인간공존의 최고의 가치와 삶을 추구하며 역사와 사회를 승화시키려는 정신과 노력에 동참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면서 의무일 수 있다. 그런 희망과 영원한 가치와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주어진 본능과 성격까지도 뒤로하고 새로운 삶의 탄생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인간은 미완성에 머무르는 존재
그렇게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사회 안에서 인간 가치를 위하는 생각을 갖춘 사람은 생각으로 행위를, 행위의 개선에서 새로운 습성을 얻을 수 있고 주어진 운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또 그런 노력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참 신앙은 새로운 삶을 탄생시킨다는 인간적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공통된 가치가 진실·자유·인간애다. 그것까지 포기한다면 인간적 삶의 의무를 거부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이란 완성을 찾아 미완성에 머물게 되어 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