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유행의 과학과 인과관계의 실종

2025-12-26

화려해 보이는 최첨단 현대 생물학의 성공은 이제는 잊힌 낡은 실험실의 퀴퀴한 냄새와 그 안에서 솟아난 엄밀한 논리의 승리 덕분이다. 모건이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좁고 지저분한 플라이룸에서 초파리와 씨름하며 유전의 염색체 지도를 그려냈을 때, 그를 지탱한 것은 거대한 연구비나 화려한 기기가 아니라 관찰된 현상 이면의 인과관계를 끝까지 파고드는 유전학적 집요함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과학은 이 ‘플라이룸’의 정신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거대 자본이 투여된 ‘빅 사이언스’의 시대는 데이터의 양으로 질적 엄밀함을 대체하려 하며, 인용지수라는 숫자의 놀음 속에 ‘유행하는 과학’이 학술지의 지면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최근 신경과학 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지 ‘뉴런’에 발표된 비판적 논평은 지난 10여 년간 생물학계를 휩쓸었던 ‘장내 미생물-자폐증 연결고리’라는 거대한 유행이 얼마나 허술한 인과관계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서늘하게 폭로한다.

장내 미생물 연구의 정치경제학: 자본이 만든 과학적 유행

현대 과학에서 특정 분야가 급격히 부상하는 배경에는 대개 학문적 필연성보다는 자본의 전략적 투입이 존재한다. 2007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주도한 인간 장내 미생물 프로젝트(Human Microbiome Project·HMP)는 그 신호탄이었다. NIH는 2012년부터 2014년 사이에만 약 9억2200만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장내 미생물 연구에 투입했으며, 이 투자는 21개 산하기관과 센터를 통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의 홍수는 연구자들로 하여금 ‘장내 미생물’이라는 키워드만 들어가면 연구비를 따기 쉽고 고영향력 학술지에 논문을 실을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장내 미생물과 자폐증을 연결하는 연구의 팽창 속도는 경이적이었다. 2011년 첫 논문이 등장한 이후 관련 논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2024년에는 연간 100편을 넘어섰으며, NIH의 관련 예산은 연간 2000만달러에서 2500만달러 수준을 유지하며 연구 지형을 일방적으로 조성했다. 이러한 양적 팽창은 과학적 진보보다는 ‘데이터 생산의 공장화’를 의미했다. 고성능 시퀀싱 기술의 발전으로 대변 샘플만 있으면 수천종의 미생물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게 되자, 엄밀한 생물학적 기제에 대한 고민 없이 일단 차이를 찾아내고 보는 ‘탐색적 연구’가 주류가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유행하는 과학’이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잡지의 편집 방침과 결합하면서 더욱 왜곡됐다는 점이다. 고영향력 학술지들은 자극적인 결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결국 ‘재현되지 않는 연구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자폐증 환자의 장내 미생물 구성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초기 여러 연구는 대부분 수십명 단위의 소규모 샘플에 의존했으며, 다중 비교에 따른 통계적 보정을 무시하거나 연구자 임의의 가설 설정을 통해 유의미한 결과만을 골라냈다. 이는 ‘플라이룸’ 시절의 유전학자들이 단 하나의 돌연변이 형질을 확인하기 위해 수만마리의 초파리를 관찰하며 세웠던 엄격한 인과적 잣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과적으로 ‘장내 미생물-자폐증 축’은 과학적 정설이라기보다는 자본과 유행이 빚어낸 현대판 ‘연금술’에 가까운 길을 걷게 됐다.

엄밀하지 못한 과학이 유행을 타고 권력과 결합할 때, 그 피해는 실험실의 담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한다. 장내 미생물-자폐증 가설이 미디어와 상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증폭되는 동안, 과학적 문해력이 낮은 정치가들은 이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삼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의 사례는 ‘허술한 과학’이 어떻게 공중보건의 근간을 뒤흔드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케네디 장관은 최근 CDC(질병통제예방센터) 웹사이트의 “백신은 자폐증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강제로 수정해 “증거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왜곡했다. 이러한 주장은 여러 과학자가 비판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혼동’을 극단적으로 이용한 결과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케네디가 장내 미생물과 같은 ‘환경적 요인’을 강조하며 백신 연구를 중단시키거나 보건 보조금을 삭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 보건복지부는 최근 미국 소아과학회(AAP)에 제공되던 수백만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갑작스럽게 중단했다. 중단된 사업에는 자폐증의 조기 식별, 유아 사망 방지, 농촌 지역 의료 접근성 확대와 같은 필수적인 보건 프로젝트가 포함돼 있다.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케네디의 백신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낸 AAP에 대한 정치적 보복과 함께 과학적 사실을 정치적 입맛에 맞게 재단하려는 시도가 깔려 있다. 이는 과학적 유행을 좇는 연구들이 인과관계의 엄밀함을 포기하고 ‘인용지수’와 ‘대중적 인기’에만 영합했을 때, 결국 어떤 괴물을 낳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에는 ‘중단 규칙(Stop Rule)’이 필요하다. 잘못된 가설로 판명되거나 재현되지 않는 결과가 쌓인다면, 그 연구 방향은 폐기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 시스템은 막대한 자본이 투여된 분야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며, 오히려 더 복잡하고 자극적인 가설을 덧씌워 생명을 연장한다. 장내 미생물-자폐증 가설은 그 전형적인 사례다. 수많은 메타 분석이 “효과가 없다” 혹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결론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천만달러의 연구비가 이 ‘막다른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장내 미생물의 유행이 미국을 휩쓸었다면, 현재 한국의 과학기술 지형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단연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 담론이다. 최근 한국 정부가 모든 연구개발 과제에 AI를 덧붙이는 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현상은 지난 10여 년간 미국을 휩쓸었던 장내 미생물 열풍의 한국판 변주곡일지 모른다. ‘AI-워싱(AI-washing)’이라 불릴 만큼 모든 연구의 말단에 AI를 억지로 끼워 넣는 행태는 현상의 본질을 파고드는 기초과학적 질문보다 유행하는 도구가 주는 편리함에 무릎을 꿇은 과학계의 민낯을 보여준다. 한국의 ‘AI 만능주의’ 역시 과학적 실체 없는 유행의 끝에서 동일한 허무주의를 맞이할 위험이 크다.

과학은 결코 사회로부터 고립된 진리의 상아탑이 아니다. 과학은 사회와 공명하며 때로는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장내 미생물-자폐증 가설의 흥망성쇠는 현대 과학이 ‘자본’과 ‘유행’이라는 두 괴물에 먹혀버린 현장을 보여주는 비극적 보고서다. 장내 미생물-자폐증 가설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는 과학의 본령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지식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여야 하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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