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블랙 요원’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6-14

정보기관 소속으로 해외에서 근무하는 요원은 ‘화이트’(흰색)와 ‘블랙’(검정색)으로 나뉜다. 화이트 요원은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한다. 비록 외교부 직원은 아니나 외교관 신분증을 발급받고 외교관 행세를 한다. 반면 블랙 요원은 철저히 신분을 속인다. 민간 기업 등의 도움으로 해외 지사 직원이나 지사장 등으로 위장한 뒤 은밀하게 활동한다. 여행사나 식당 등을 차리고 이를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자연히 블랙 요원의 신상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핵심 기밀에 해당한다.

2024년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군무원이 우리 군 정보 요원의 신상을 중국에 넘긴 사건이 적발돼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2019년부터 약 30건의 군사 기밀을 중국 측 요원에게 제공한 대가로 1억6000만원 넘는 돈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는다. 중국 정보기관에 건네진 기밀 중에에는 한국군 블랙 요원 명단도 있다고 한다. 올해 1월 군사법원은 해당 군무원의 1심에서 징역 20년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유출된 기밀에 정보관들의 인적 정보 등이 포함됐다”며 “정보관들의 생명·신체의 자유에 명백한 위험이 발생했다”고 질타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해임된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90년대부터 오랫동안 블랙 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계엄 당일 윤석열 대통령한테 ‘정치인 체포’ 지시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이는 국민적 공분을 샀고 국회가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에 윤 대통령 지지층에서 홍씨를 두고 ‘북한이 국정원에 심은 간첩 아니냐’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자신을 겨냥한 근거없는 공세에 홍씨는 “40년 동안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이 내가 했던 일”이라고 반박했다.

13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새 원내대표로 3선의 김병기 의원(서울 동작갑)이 선출됐다. 국정원에서 26년간 근무한 그는 이번 경선 과정에서 자신을 “이재명 대통령의 블랙”이라고 소개했다.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국정원 블랙 요원처럼 물밑에서 이 대통령을 뒷받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이야 바람직하나, 자칫 양자가 수직적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김 신임 원내대표는 여당이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휘둘린 것이 전임 윤석열정부가 실패한 주된 원인 중 하나란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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