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고 작은 행사장에 갈 때마다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커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촬영하는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은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대개 자세를 제대로 잡지도 않은 채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것과 다르게 눈으로 표적을 좇고 어느 순간 시선을 고정한 채 카메라를 재빨리 들어 올려 한 컷을 잡고 바로 이어서 다음 타깃을 찾았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듯 카메라의 모니터를 보며 촬영하는 게 아니라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찍었다. 선수의 눈에 보이는 전문성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전문 사진작가인 줄 알았다.
결과물을 본 적이 없지만 촬영하는 자세,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 큰 동작은 없지만 조용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민첩성과 신중함으로 볼 때 그의 사진은 많은 이야기를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씨네울산_울산365경’을 촬영할 때 몇 번 동행을 요청했었다.
그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의아했다. 의도하진 않은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움직임에 비해 사진 문법이 거칠었다. 반면에 구도는 무척 정직했고, 스펙터클 할 거라 예상했던 미장센은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그것이 김윤삼 작가의 정체성이다. 배우지 않았으므로 틀에 갇히지 않았고, 정직하며 섬세한 것이었다.
그는 시를 쓴다. 평생을 몸담아 온 노동 현장을 기록했고, 일터 밖의 고마운 이들을 기록했으며, 정의롭거나 정의를 요구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기록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이야기를 시로 표현했다. 그의 첫 번째 시집 <고통도 자라니 꽃 되더라>(2021)는 노동과 노무현을 노래했고, 두 번째 시집 <붉은색 옷을 입고 간다>(2022)에는 노동의 신산스러움을 그려냈다.
2024년 인터뷰를 진행할 당시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그 사이 그는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이제 독자들을 그만 기다리게 하고 세 번째 시집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 2024년 5월 23일에 진행한 인터뷰를 늦게 소개합니다. 아래 QR코드를 통해 김윤삼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진작가, 김윤삼
Q. 9월에 열리는 사진 전시회 얘기를 해달라.
9월에 열리는 사진 전시회는, 이상일 선생 수업을 받은 사람들이 포항에 스무 명, 울산에 스무 명, 그다음 진주에 스무 명이 있는데, 전체 단체 이름은 ‘성가 물결’이고, 울산에서 하는 스무 명이 단체전을 아마 9월에 할 것 같다.
작품을 처음으로 한번 내볼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 전에 사진은 뭣도 모르고, 지금 환경단체인 ‘초록별 지구 수비대’의 일원으로 하고 있는데, 한 5년 가까이 찍었지. 아, 6년째네. 4년째 하면서, ‘초록별 지구의 수비대’를 방문하면서, 이 사람들이 고마워서 사진을 한 장씩 돌려줘야 하겠다, 한 점씩 해서 개인전을 한번 한 적이 있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고 난 뒤에 찍은 한 명 한 명의 사진들을 돌려줬고.
그거는 어떻게 보면 취미 활동이었고, 지금은 사진을 좀 전문적으로 찍어서, 그렇게 전문이라는 거는 좀 그렇고 뭐 아마추어지만, 그래봤자 취미 활동이지만, 좀 더 나은 사진을 볼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진은 그 메커니즘이 갖고 있는, 사진 카메라가 갖고 있는 메커니즘을, 어떤 피사체를 어떻게 나의 마음을,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내가 가진 생각들을 심어줄 것인가, 대상을 표현할 것인가, 이게 문제인데 거기에 대해서 참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거든.
그러면서 새로운 작업도 두 가지 정도를 하고 있다. 글 쓰는 것 하고, 사진은 내가 저 끝에 가는 날까지 계속하고 싶은 작업이다.
시와 사진이 닮은 이유는 파편을 서사적으로 엮어낸다는 것
Q. 어떻게 보면 두 작업이 비슷하다. 닮았다. 정해진 틀 안에 채워 넣는 거.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시와 사진은 닮았다. 계속해 보겠다.
내가 글공부는 많이 안 했지만, 말한 것과 똑같다. 뭐가 그러냐면, 다른 건 모르지만 시와 사진은 닮았다. 왜 그러냐 하면, 수필이나 산문 같은 경우에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공간을 채우는 거지만 시는 파편적이기 때문에 사진하고 닮았다.
사진은 공간적인 개념을 잘라내지만 어떻게 보면 시간성을 더 많이 담고 있거든. 나는 시간이 파편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진에서 한 장보다는 최소한 다섯 장에서 스무 장, 서른 장까지 (찍는다. 사진에서) 내러티브가 중요한 이유는 시처럼 파편적인 걸 서사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보는 거지.
시와 사진은 닮아 있기 때문에 이건 계속 한번 해보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Q. 이번 단체전의 경우에 어떤 작품을 출품할지 궁금하다.
내가 (현대)자동차를 35년 정도 다녔다. 어떻게 보면 내 삶의 일부였는데, 그 일부가 산업화에 밀려서 사실은 없어지는 거잖아. 물론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 다른 공장으로, 다른 지역으로 가겠지.
그래, 그 사진은 사실 사명감도 좀 있고, 내 삶도 있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의 삶이다 싶어서, 내가 찍어야겠다고 생각해서, 3년 6개월 정도를 이걸 남기기 위해 찍었다. 사진 수로 보니까 한 7천 장 정도 되더라고. (촬영 장소가) 환경이 안 좋으니까, 먼지가 많이 나고 열이 나고 어두우니까 결국은 살려낸 사진들이 한 스물세 점 정도 된다.
이걸 내러티브 해놨는데, 한 번 단체전하고 나면 개인적으로 개인전으로도 생각하는 부분이 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사진을 더 골라내 가지고, 만약에 개인적인 사진 개인전을 하게 되는 것 같으면 책으로라도, 사진집으로도 남겨놔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집을 발간하면서 개인전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예술이란 사랑이자 예의이다
Q. 가족 이야기로 가보자.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
공장에서 만났지. 공장에서. 사내 커플은 아니고.
내가 처음에 일하러 간 데가 공장이 조그마한 데였다. 조그마한 회사에 하청 업체들이 몇 개 몇 개 있지 않나. 거기서 우리 집사람은 경리를 했고, 다른 공장에. 한마디로 눈이 맞았지. 그래서 결혼하게 됐다.
Q. 첫 번째 애인?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 나중에 (부인이) 보면….
Q. 고등학교 때 인물이 좋았을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날) 좋아하는 사람 많았지. 나는 (내가 잘생겼는지) 그런 거는 모르겠는데.
모든 예술성의 기본은, 난 그렇게 보거든. 어떤, 사랑이고 예의라고 보거든. 그래서 인간이, 이성한테 느끼는 호감은 무척 많았다고 본다. 그중에 이제 한 분이 아, 결혼해야 하겠다, 이렇게 선택이 된 거지.
Q. 그 이후로 눈 돌린 적은 없고?
눈 돌릴 수가 없지. 사는 게 바빴으니까.
Q. 누가 먼저 고백했나?
내가 먼저 했다. 여자분보다는, (보수적이었던) 그 당시에는 그래도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Q. 결혼할 때 각각 나이는 어땠나?
그때 좀 조숙했다. 그땐 일찍 가는 분위기였거든. 내가 스물여섯 살, 우리 집사람이 스물네 살, 이렇게 했다.
딸 둘의 아비로서 보수적으로 사위를 골랐고, 모두 잘 산다
Q. 애들은 몇인가?
딸 둘이다. 내가 딸기 공주 아빠다. 딸 하나, 계집애 하나.
큰 애가 서른네 살이고, 작은 애가 서른 살이다.
한 명은 시집가서 거제에 가 있고, 하나는 울산에 있다. 둘 다 결혼했다.
Q. 할아버지가 됐나?
그렇다. 할아버지다, 내가.
큰 애는, 큰 손자는 내년에 학교에 간다.
이야기하면 좀 길려나 모르겠는데, 큰 애는 캠퍼스-커플이었다. 그런데 얘가 결혼을 안 하는 거다. 그때가 스물일곱 살이었다. 내가, 너희들 벌써 6년째 사귄 걸로 알고 있는데, 너 잘못하면 결혼 못 하고 큰일 난다. 너 결혼해야 한다.
우리 첫째 친구인 배 서방 오라고 했지. 너희 결혼할래? 이러니까 숨도 안 쉬고 예, 이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 이거는 결혼식이 되겠다. 어른이 되면 아이들 볼 때 조금 주의 깊게 보지 않나. 그러면 너희들 2주 뒤에 결혼 계획서를 써 오너라, 이렇게 했다. 내가 그런 데는 고지식하다. 그럼, 내 사랑하는 딸을 보내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이주일도 아니고 일주일 있으니까 연락이 왔더라고. 이래저래 이야기하는데, 집은 사는 데 부채는 40퍼센트 이상 되고, 그러면서 이렇게 자기가 버는 돈, 우리 큰애가 버는 돈하고 하면 이자를 얼마만큼 내고 얼마만큼 저축할 수 있겠다, 이러면서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사랑이 앞으로 들어가는 보험료가 얼마 됩니까, 이렇게 묻더라고. 그거 몰라서 계산 안 했다고.
아, 인마 결혼식이 되겠다, 얘들은. 그래서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했지. 너희 약혼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결혼시켜야겠다. 그래, 너 아버님하고 어머님하고 보자, 이렇게 해서 날 잡아 결혼시켰다.
작은 거는,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카톡이 왔어. 밤에 12시 넘었는데. 난 그때 되면 자는데, 뭘 모르고 있는데, (문자가) 탁 왔어. 아빠, 편지함에 편지 넣어 놨으니까 한번 봐주세요, 이러는 거. 딱 보니까 편지가 두 통 들어있는 거야.
내용을 보니까 사고를 쳤어. (첫째와 예비 사위) 둘 다 사랑하는 아빠, 사랑하는 엄마가 되겠다.
하, 그래서 집사람하고 의논하고 난 뒤에 큰 애를 불렀지. 어차피 결혼해서 살고 있었으니까. 불러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한 번 물어보고, 한 번 헤어지라 해보고, 그래도 안 헤어진다고, 산다고 하면 그때는 말하자, 이래.
보니까 괜찮더라고. 그래서 결혼시켰지.
그(때 뱃속에 있던) 애가 더 커서 내년에 학교를 가. 큰 애는 시집을 일찍 갔는데도 늦게 애를 낳고, 얘는 사고 치는 바람에 빨리 낳았지. 그래, 지금 잘살고 있어, 둘 다.
젊어서 할아버지가 되고 보니 좋은 점이 참 많더라
Q. 일찍 할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 일찍 되니까 좋은 것도 있더라. 늦게 하면, 예를 들어 뭐 뭐 사달라고 했을 때 못 사주고 이런 게 있지 않나. 근데 할아버지가 젊어서 돈을 버니까, 회사 다니면 돈을 버니까, 궁핍하지 않게 사줄 수 있으니까 그거는 좋더라고.
Q. 여생을 부인과 울산에서 계속 보낼 건가?
울산에서 살 생각을 하고 있다.
근데 지인 소개로, 돈 된다고 그래서 밀양공항 때문에 한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땅을 구매)할 때 청도에 땅을 샀어. 거기 가서 한 번 살 생각도 하고. 자연이 너무 좋고, 또 물도 많이 있고. 글 쓰거나 이러기에는 참 좋을 것 같아서 (청도에 가서 사는 일을) 고민하는 것도 있다, 사실은.
조용하다. 거기 청도가 보기보다 조용한 동네고, 나름은 또 괜찮더라고. 내가 있는 그 산 동네가, 땅 산 곳이 있는 데가 걸어서 5분만 가면 병원하고, 촌이지만 병원하고 카 인테리어, 마트 이런 것들이 다 있거든. 그래서 그쪽으로도 생각하고는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들수록 병원하고 문화시설이 가까운 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난 울산에 살면서 이렇게 문화생활하고 즐기면서, 즐기는 것보다는 문화생활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만들어 가면서 이렇게 사는 게 좋겠다….
어떻게 보면 청도라는 데 들어가게 되면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단절이라고 보거든. (청도에 살아볼까 하는) 그런 생각은 있지만 여기서 살고 싶다.
울산 유일의 진보 언론, 울산저널은 노동자 도시의 자존심이자 핵이다
Q. 마지막으로, 울산저널 식구와 이사들, 필진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울산저널은 울산에서 유일하게 시민이 만든 진보 언론이라고 본다. 일주일에 한 번 나오기 때문에 주간지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내용들은 시민들의 삶을 담고 있으므로 좀 많은 분이 보고, 또 후원을 통해서 날마다 신문을 낼 수 있게끔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게 울산이라는 공업 도시가 갖고 있는 자존심이자 노동자 도시가 갖고 있는 핵이라고 본다.
울산저널이 영원히 발전하기를 바란다.
이민정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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