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나는 뭔가 희망이 보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회에 처음 입성한 김00 의원에게 수석님이라 부르는 것은 이 전무가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근무 당시 김 의원이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00 전무가 종두 너를 잘 안다고 했는데 어떻게 아는 기고?” 김 의원이 물었다. “참 묘하게 알게 된 친구지요.” “그래? 그기 무슨 말이고…?”
사실 이00 전무, 그와 나는 어쩌면 4.19가 맺어준 묘한 인연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교육주간 행사의 하나로 학생 글짓기 대회가 울산 학성공원에서 열렸다. 울산군내의 학생들이 참가해 “빨래”라는 제목으로 산문부와 운문부로 갈리어 실력을 겨루게 되었다. 빨래란 제목은 의외의 제목이었다. 나는 모두가 썩은 우리 사회를 이제 빨래를 해서 깨끗하게 만들자는 이미지를 담아 시로 쓰게 되었다. 그것이 1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울산은 도시 규모가 작은 곳이어서 지역신문이 없었다. 어찌 된 일이었는지 몰라도 부산에서 발간되는 국제신문에 백일장의 내 작품이 실리게 된 것이다. 고등학생의 글이 신문에 실린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 신문에 실린 내 작품을 대구의 명문고등학교 문예반 지도교사가 들고나와 “보기글”로 설명했던 모양이다. 글짓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이00 전무가 아주 인상 깊게 내 이름과 작품을 새기게 되었다. 훗날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날 때 4.19 학생 선언문을 쓰게 된 이00 전무가 고향 친구와 같이 만나서 어느 빵집에서 빵으로 점심을 때울 때였다. 고향 친구가 나를 소개하면서 친구들과 선배들의 러브레터를 도맡아 대필해주는 문사(文士)로 소개하게 되었다. 명석했던 이 전무는 혹시… 혹시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이름과 빨래라는 시를 거의 외우고 있었다. 그렇게 손을 잡은 다음 우리는 친히 만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판단력이 명석했던 그가 출세가도를 달리며 나에게 베풀어준 정의(情誼)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김 의원은 이 전무를 극찬하며 “그 친구가 수석님! 최 형 건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할 때는 그것이 바로 보증수표야. 야! 종두! 힘내라!” 하면서 나의 등을 탁 치는 것이었다.
울산으로 돌아온 나는 설렘 속에 사흘을 넘겨도 서울이나 회사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했다. 사흘을 넘기고 나흘째가 되는 아침이 되어 이 전무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사장님이 늦게 돌아오는 관계로 며칠 늦게 되었다면서 어제 울산 회사로 연락이 갔으니까 알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가슴을 꽝 두들기는 것 같았다. 그러자 다음날 회사의 총무국장으로부터 출근 통보를 받았다. 아! 신은 누구에게나 결코 절망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깊은 수렁에 빠졌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해직 통고를 받고 비통해하던 그날. 난생처음으로 경험해야 했던 유치장 생활. 같은 하늘 아래이면서 지지리도 고달팠던 순화교육대. 몸과 마음, 육체를 씻어준다면서 뼛속까지 멍들게 했던 그 생지옥. 쓰러지면서 질러대는 비명소리.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그 비명소리가 자꾸만 환영(幻影)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이 모습을 못 보고 눈을 감으신 어머니의 오랜 한을 풀었다는 것이 스스로 장하기만 했다. 내 인생의 쓰라린 공백기… 그러나 값진 경험을 했다. 이 공백기의 경험을 깔고 앉아 살아간다면 또 다른 시련이 닥친다 해도 이깐 것! 하고 꿋꿋하게 일어설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들리는 그 통한의 비명소리만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찾아갔다. 새로 부임해 있었던 사장님과 사우들을 만났다. 반갑기만 했다. 그러나 어쩐지 회사의 분위기는 옛 같지가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이 회사는 신청사를 거의 다 완공하고 이사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청사로 가보았다. 사장님을 뵙고 내가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사장님은 벌써 신청사로 가서 작업복 차림으로 돌을 손수 옮기는가 하면 마무리된 공사에 뒷손질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 혼자서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만큼 회사에 애정을 쏟으면서 한 번 멋진 회사로 꾸며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지난날 울산시가 도심지에 공동묘지를 건설하려는 회사의 중역과 허가를 두고 의견을 달리 했던 일, 사장님의 측근이 들어 태화강 하류의 모래섬 하나를 들어내게 되었던 일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경우와 지금의 경우를 비교하면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지금 사장님의 모습도 그런 이권에 개입되어 있는 모습이 아니라 회사를 위한다는 단 한 가지의 집념만으로 보이게 되는 존경스런 모습뿐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마음 한쪽에 생기고 있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신청사가 들어서게 된 위치였다.
제2의 학성공원이라 불리는 신청사의 건립지는 역사의 땅이었다. 역사의 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늘의 울산광역시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말 별호를 학성(鶴城)이라 불렀던 하곡현(河曲縣)을 만나게 된다. 이 하곡현의 치소(治所)가 된 계변성에 효공왕 5년의 어느 날 금붙이로 된 천신상을 맨 학 한 마리가 성안으로 날아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대단한 길조라고 입을 모으며 그때까지 학성이라 부르던 계변성을 신학성(神鶴城)이라 부르고 성주인 박윤웅(朴允雄)을 신학성 장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박윤웅은 이 고장 최초의 지배자이면서 실명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박윤웅은 울산광역시의 기틀을 닦은 개시조인 동시에 개향조가 되는 인물이다. 이런 유서 깊은 곳을 어떻게 신청사의 부지로 정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기만 한 것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총무국장에게 물어보았다. 총무국장은 건축법상 또 모든 법상으로 하나도 문제 될 게 없다면서 정상 절차에 따라 건축 허가와 준공검사를 받은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서류를 보여주는 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지난날의 일이 생각났다. 예를 들어 사장님에게 한마디만 덧씌워 보고한다면 다시 괜한 일로 오해를 사게 되고 윗사람에게 밉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신경을 쏟는 것일까? 향토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 있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원망스러워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올곧은 언론을 외치지만 과연 이 땅이 올곧은 언론이 먹혀드는 곳인가? 바른 것을 내세우는 언론이 과연 제값을 할 수 있는 풍토인가? 아무튼 가냘픈 언론인으로 풍차 앞에 칼을 빼어 든 돈키호테로 되어져 버린 세상이 아닌가. 더구나 권력 앞에 약자일 수밖에 없는 지금 우리 회사의 기자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택락 전 사장이 내 을 잡고 타이르듯 말을 했다. 이제는 그만그만 덮어버리고 넘어가는 기자가 되어야 한다. 너 혼자 다수의 권력과 싸운들 누가 우군이 되어줄 것이며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우선 비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도 그 말을 지난날처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부당한 권력에 반항하는 정의로움도 중요하지만 나를 위하여 이구동성으로 권고하는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나는 경기도 포천의 그 무시무시한 교육대에서 행해지던 교육을 어쩔 수 없이 받고 있다는 각오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나는 그저 푹 죽은 자세로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하기로 하면서 현실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과거와 생각이 당장 굴욕처럼 안겨진 예상 밖의 직급으로 복직의 인사발령을 받고도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국보위에 의해서 대변혁을 맞게 되고 그것이 한 치라도 거역할 수 없는 규칙이 된다면 원상대로 복직을 시키고 나의 숙정을 무효화하는 명령을 나 혼자에게만 적용하지 않는 회사였지만 나는 한마디의 항의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영문도 모르고 회사를 떠나 짓밟힐 대로 짓밟힌 자가 마지못해 받아들인 촉탁직이 나에게는 기진맥진에 이른 피해자가 겨우 목숨만은 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촉탁직으로서의 복직은 또 한 번 당하게 된 부당한 굴욕이었다. 어디로 가서 슬픈 노래를 실컷 부르고 큰 고함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좌절감만이 텅 빈 가슴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토록 열망하던 복직의 뜻을 이루고 나서 나는 한동안 가슴을 누르는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 무거운 마음속에는 언론에 대한 회의가 더 강하게 가로막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바로 보는 예리한 관찰로 쓰되 외압에 꺾이지 말자! 는 굳은 의지를 그때의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신조였다. 그러나 이마저 주먹을 쥘만한 자신이 없어졌다.
열 번 스무 번을 생각해 보아도 언론이라는 것,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 바르게 쓰며 꺾이지 않을 정론(正論), 직필(直筆)은 한낱 사치스런 단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오늘날 이 나라에는 이러한 언론 상황을 말하면서도 외부로부터의 제약을 빌미로 도피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언론 자유 역시 또 바르게 써야 하는 직필도 다른 자유를 찾아내듯이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어야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내일을 위하여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언젠가는 이 나라에도 그것을 구가할 날이 올 것이다. 아니 오고야 말 것이다. 촉탁직원이면 어떻고 그보다 더한 직책이면 어떠랴.
호랑이는 잡지 못하더라도 호랑이의 그림자만이라도 보기 위해서 나는 지난날의 직장으로 돌아왔다. 허탈감과 좌절감이 찾아주는 슬픔을 딛고 일어서 보자. 나는 나에게 설령 내가 겪었던 암담한 고통이 또 닥친다고 하더라도 운명이라 여기면서 살아보자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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