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줄곧 상상력이 지성이라고 말해왔다. 독서와 토론, 경험과 성찰을 토대로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풍부하고 구체적인 상상력을 기르는 것이 고등교육 수혜자의 시민적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부, 경험, 성찰로 구체화되는 상상력의 반대편에는 무지한 망상이 있다. 망상을 장착한 사람은 당면한 문제 앞에서 곧잘 자신을 피해자로 착각하는 자기연민에 빠지고, 자기보다 취약한 존재를 발명하듯 찾아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등 자주 비열해진다.
트럼프는 유명해진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중임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이번 취임식에서 자국민 보호는 못하면서 불법 이민자에게만큼은 피난처를 제공해왔기에 미국의 사회적 질서가 무너진 것이라는 거짓 선동과 자기연민을 쏟아냈다. 이것은 저임금과 제도적 보호 밖에서 일해온 수많은 이주노동자 덕분에, 200여년의 짧은 역사에도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엄연한 사실에 대해 무지한 발언이다. 다 가졌으면서도 다 뺏긴 자로 자신을 규정하는 인지 오류, 망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정권 잡은 여당과 대통령이 합심해 흩뿌리는 부정선거, 반국가세력, 빨갱이, 중국인 등의 언설이 판치는 작금의 한국 상황을 보면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대통령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존재로 자기를 소개하면서도 더 나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한 상상력을 공유해준 여성이 있다. 그녀가 제안한 ‘소외된 시민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광장의 수많은 2030 여성들에 의해 메아리쳐 갔으며, 보수 원로 정치인조차 이 울림이 미래 한국의 희망이라며 상찬했다. 그녀들과,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한 폭도 중 절반이 넘는다는 2030 남성을 굳이 대비시키지는 않으려 한다. 광장의 그녀들 옆에서 함께 입김 뿜으며 구호를 외친 청년 남성도 있고, 이름조차 끔찍한 백골단 명단 엔 청년 여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 차이는 그러므로 성별이 아니라 희망하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독재 타도”를 외쳤던 1987년 이후에도, “탄핵”을 소리쳤던 2017년 이후에도 공기처럼 느껴질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상상했을 ‘소외된 시민’에게 귀 기울이지 않은 사이, 한국 사회에는 허울 좋은 빈말만으로도 정권을 주고받는 것이 가능해진 반지성주의 정치 생태계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올 것이 온 것처럼 부정선거, 반국가세력, 카르텔, 페미니스트 등에 대한 망상으로 자유민주주의 철학을 온전히 위반한 자가, 신성한 법정에서조차 자유민주주의 신념으로 살아왔노라고 감히 입을 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2025년, 이번에야말로 광장의 구호 너머 구체적 상상력으로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행할 탄탄한 공동체의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 시작은 광장의 그녀가 가르쳐줬듯, 소외된 시민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경청이다. 이들만큼 어제보다 더 정의로운 오늘, 오늘보다 더 다양한 존재들이 공존할 미래, 구호 너머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를 매 순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들을 차근차근 실행해낼 때 몽매한 망상이 다시 활보하지 못할 민주사회에 가닿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