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한 교육부 장관 지명 철회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참된 교육 철학을 가진 사람이 교육 수장에 오른 것을 보지 못한 이 나라의 현실이다. 교육의 공공성·자율성은 교육 행정의 당연한 역할이다. 지도자들이라면 그 위에 ‘어떤 교육이어야 하는가’라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또한 페스탈로치나 방정환처럼 아이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자본과 권력의 사다리를 향한 숱한 사교육과 그 카르텔을 보고도 묵인할 수 있을까. 청소년의 10% 이상이 자살 충동을 느끼고, 매년 수백명이 자살하는 이 고통의 현실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의 이상은 유한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있다. 하여 무(無)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가 아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교양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묻는다.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가. 모른다면 왜 이 교실에 앉아만 있는가. 들판을 뛰어다니며 해답을 구해야 하지 않는가.” 존재에 대한 물음이 앞서야 한다. 실존주의 철학이 말하듯 우주에 던져진 고독자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누구도 자신을 구속한 적이 없는 대자유인임과 동시에 스스로 결단하는 주체적 인간이 된다. 오늘날 교육공학의 한계는 자유로운 본성을 무시하고,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무모한 신념이다.
그러한 교육은 지식을 무한대로 제공하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맞지 않는다. 인간을 능가하고자 하는 과학의 욕망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기계다. 행렬, 함수, 수리 모형의 수학적 계산과 추론에 의한 결과물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특성인 자비와 연민을 느낄 수 있을까. 통합과 통찰의 능력, 정의를 향한 열정과 대가 없이 희생하는 대의를 가질 수 있을까. 피에르 부르디외가 제시한 아비투스, 즉 몸의 경험을 통해 내면화된 인간의 습관 체계를 인공지능도 발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최종적으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공감과 연대의식으로 사회화되거나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면 그것은 인간의 모방일 뿐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질은 결국 교사의 질이다. 국민국가가 주도한 표준화 및 규격화에 끼워 맞춘 교육은 한계에 처했다. 그사이 교사는 지혜를 기르는 스승의 자격을 상실했다. 조선시대 김계휘는 큰아들 김장생을 송익필에게 맡겼다. 자식이 그리워 8년 만에 찾아가보니 물 긷고 나무만 하고 있었다. 가져간 <사략> 한 권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애써 배우지 않고도 알면 더 좋지 않은가”라는 송익필의 말을 듣고 나서 비로소 자식이 문리가 터진 것을 알았다. <논어>의 ‘군자불기(君子不器)’ 교육이다.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로 권력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높은 도덕적 품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학생은 교사를 능가할 수 없다. 교실을 스마트한 제품으로 꾸밀 것이 아니라 교사를 정치와 경제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그들이 이 세계의 문제를 고민할 때 학생도 따라서 고민하게 된다. 최고의 교사가 국가의 미래다.
지구를 황폐화하는 것도, 문명을 나락에서 건져줄 존재도 인간이다. 모든 선과 모든 악이 가능한 인간이 유일한 희망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똑똑한 사람이 아닌 보다 나은 사람을 위해 주입식·암기식 교육 시스템을 폐기한 싱가포르의 헹 스위 키트 전 교육부 장관, 평등한 무상교육과 낙오 없는 교육을 실현하고 좋은 교육은 좋은 교사가 만든다는 모토로 교사의 질을 향상해 교사를 가장 인기 높은 직업으로 만든 크리스타 키우루 핀란드 전 교육과학부 장관, 2018년 세계교사상 수상자로 런던의 다문화사회에서 관계 형성을 위한 미술교육으로 학생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낸 영국의 안드리아 자피라쿠 선생 같은 인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철학 있는 교육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품고, 그들의 존재 가치가 스스로 발현되도록 돕는 자를 말한다. 부디 이러한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교육 수장이 나오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