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텍스트힙 집어삼킨 계엄…책에서 희망과 위안을 찾았다

2024-12-26

올해 한국 사회는 최고의 시간과 최악의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정점에 올랐던 자긍심은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로 한순간에 바닥까지 추락했다.

출판계도 빛과 그림자가 교차했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은 대한출판문화협회와 문화체육관광부의 갈등으로 정부 지원 없이 열렸는데도 방문객이 전년보다 15% 증가한 15만명을 기록했다. 군산과 전주, 제주 등 지역 북페어도 성황리에 끝나 이 만개한 ‘유튜브의 시대’에도 책읽는 독자들이 존재함을 확인시켜주었다. 여기에 ‘텍스트힙’(읽는 것은 멋있다)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면서 끊임없는 독서율의 추락에 제동이 걸리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그러나 연말의 비상계엄 후폭풍과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출판계는 노벨상 특수로 잠시 온기를 띠었던 출판시장이 다시 얼어붙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경향신문 문화부는 올해 ‘책과 삶’에서 소개한 신간들을 대상으로 ‘올해의 책’ 10권을 선정했다. 독서는 자신과의 대화다. 독자들이 격동의 한 해를 차분히 마무리하는 데 이 책들이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쇠락하는 산업도시 울산의 빛과 그림자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양승훈 지음 | 부키

전작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산업도시 거제의 빛과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던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가 경남의 또 다른 산업도시 울산의 현재를 분석했다. 울산은 2017년 서울에 1위를 빼앗기기 전까지 약 20년 동안 국내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부유한 도시였으나, 최근에는 제조업 성장 둔화와 인구 감소로 위기를 맞고 있다.

울산은 1960년대 이후 고속 성장한 한국 경제의 견인차였으나, 1990년대 이후 2010년대까지 20여년 동안 기업 연구소를 필두로 그와 밀접한 설계 부문 등이 수도권으로 이전하는 ‘공간 분업’ 현상이 강화하면서 ‘생산기지’로 전락했다. 이는 여수, 울산, 포항, 구미 등 다른 지방 거점 산업도시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산업도시의 쇠퇴는 한국 제조업의 불길한 미래를 예고한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청년과 여성이 머물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만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처럼 ‘마음의 상처’ 앓는 동물들

우린 모두 마음이 있어

로렐 브레이트먼 지음 | 김동광 옮김 | 후마니타스

누구나 때로는 미칠 수 있다. 여기에 저자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사람이 그렇듯,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반려견 올리버는 극심한 강박장애, 분리불안을 갖고 있었다. 4층 아파트 창문에서 밖으로 뛰어내렸다가 살아났지만,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올리버의 죽음이 저자를 동물 정신건강에 대한 연구로 이끌었다. 서커스 공연에서 받은 학대로 극도의 공격성을 보이는 코끼리, 자해를 멈추지 못하는 보노보, 중증 우울증을 앓던 회색곰…. 저자는 6년간 세계 곳곳의 ‘마음 아픈 동물’을 만나고 신경과학자, 동물행동심리학자, 수의사 등을 만나며 동물의 정신건강에 대해 광범위하게 탐구한다.

동물의 정신건강은 인간과 유사할 뿐 아니라 깊이 연관돼 있었다. 동물들은 인간에 의한 학대·감금 때문에 정신 이상을 보였을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건강을 위한 연구과 약물 개발을 위해서도 실험 대상으로 희생당했다.

인간만이 복잡한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일격을 가하는 책이다.

보수적일수록 공포·혐오 ‘편도체’ 더 사용

유전자 지배사회

최정균 지음 | 동아시아

인간유전체학을 연구하는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의 최정균 교수는 책에서 유전자가 인간의 본능적 감정은 물론 경제 현상과 정치 성향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진화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작동하는 신경 기관의 메커니즘”이다. 과시적 여가와 소비 행위는 “번식을 위한 유전자들의 욕구의 발현”이다. 정치적 보수 성향도 유전자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학자들은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공포와 혐오 정서를 발동시키는 뇌 기관인 편도체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본다. 보수적일수록 위험 회피라는 진화적 본능에 더 충실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수많은 사회현상을 유전자와 진화의 원리를 통해 설명하지만 지나친 유전자 결정론은 경계한다. 그는 “어쩌면 과학의 힘으로 외부의 자연과 싸우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 자신과 벌이는 내적 갈등과 도덕적 투쟁이 훨씬 힘든 작업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장애인 무용수들 춤에서 ‘아름다움’ 묻다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김원영 지음 | 문학동네

전작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장애인의 존재에 대한 법적, 사회적, 윤리적 물음을 던진 김원영 변호사는 이 책에서 ‘비정상의 몸’에 관한 미학적, 사회적,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책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토대인 ‘몸’과 이를 표현하는 예술인 ‘춤’을 중심으로 차별과 평등의 문제를 탐구한다. 무용수로도 활동하는 작가는 ‘아름다움’에 사회적 가치인 기회의 평등을 적용할 수 있는지 묻고, 장애를 가진 몸과 장애인 무용수들의 춤이 도덕이나 인권의식 없이도 매혹적일 수 있는지 질문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정상성’ 기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추상적 평등 이념에 아름다움을 제한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을 포함해 구체적 삶 속에서 자신의 몸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무대를 변화시키며 각자의 방식으로 독자적 아름다움을 창조한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몸과 춤에 대한 깊은 탐구와 무용수로서의 여정을 통해 독자는 서로 다른 몸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움, 경이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미국 헌법의 결함이 낳은 다수결의 민낯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미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취약성을 분석한 책이다.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화당의 책임을 추궁한다. 공화당은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는 시민권법과 투표권법 개혁안 통과를 주도한 중도우파 정당이었으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이후 ‘백인의 분노’를 동력으로 삼는 급진적 우파 색채가 강해졌다.

애초 다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마련된 미국의 헌법은 극단적 소수의 지배를 허용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고 있다. 저자들은 유권자 투표에서 져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간접선거 방식, 주별 인구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 상원 의석 배분, 연방대법관 임명권을 지닌 대통령의 정치 성향에 따라 연방대법원의 진보 대 보수 구도가 흔들리는 상황 등 미국 헌법의 결함을 상세하게 살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헌이 필요하지만 미국에서 개헌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들의 전작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 집권기 미국을 이해하는 데 도음이 되는 책이다.

김일성에 반기 든 공산주의자들의 최후

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 사건

김재웅 지음 | 푸른역사

김일성의 권력에 도전했던 연안파와 소련파 인사들이 1956년 8월30일 조선노동당 전원회의 이후 대거 숙청됐다. 이른바 ‘8월 종파 사건’이다. 북한사 연구자인 김재웅 박사는 ‘반혁명 분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라는 북한 당국의 해석과 북한 권력층 내부의 분파 투쟁이라는 남한 연구자들의 해석을 모두 지양하고, 8월 종파 사건은 ‘양심적 공산주의자들의 실패한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반김일성 세력은 전후의 열악한 식량·의료 상황으로 인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소련에서 개인숭배 격하 운동이 벌어지는 상황에 고무돼 1956년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실각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김일성 측이 대응책을 세운 데다 동유럽의 정치적 격변에 놀란 소련이 입장을 바꾸면서 승부의 추는 김일성 쪽으로 기울었다. 저자는 그 결과 북한 체제 개혁의 가능성이 소진되고 이후 북한이 김일성 일인 지배 체제로 경직됐다고 평가한다.

68년 전 북한 권력의 핵심부에서 발생한 사건을 잘 만든 정치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복원한 저자의 필력이 돋보인다.

태평양전쟁 일본군의 주민 학살 만행 고발

오키나와 스파이

김숨 지음 | 모요사

소설가 김숨은 역사를 소재로 시대의 아픔과 내몰린 자들의 고통을 특유의 서사와 언어로 그려 왔다.

12번째 장편소설 <오키나와 스파이>는 태평양전쟁 시기,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섬 구메지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당시 일본군 수비대장 가야마 다다시의 지휘 아래 20명의 주민이 무참히 살해됐다. 이 20명의 희생자 중 7명은 조선인 구중회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작품은 구중회를 모델로 한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가족들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작가는 당시 기록과 여러 차례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참혹한 학살과 전쟁의 광기가 지배했던 역사를 재현한다.

그는 “너무나도 분명한 악과 악행과 악인을” 상상하고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면서 “이 소설을 끝맺기 위해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해야 했고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써야만 했다”고 고백한다.

고통스러웠을 집필에 경외심이 느껴지는 한편, 희생자들의 고통과 군국주의의 광기를 직면해야 하는 독자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독서다.

‘원고 반환’ 법정 다툼…누가 소유주일까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베냐민 발린트 지음 |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올해 사망 100주년을 맞은 카프카 유고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에바 호페라는 여성과 두 국가(이스라엘·독일) 사이에 벌어진 소송을 소재로 한 책이다.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원고를 모두 없애달라는 카프카의 유언을 무시하고, 원고를 정성스럽게 보존했다. 나치를 피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망명한 브로트는 종전 후 이스라엘 시민이 됐고, 비서 에스테르 호페(에바의 어머니)를 유산 상속인으로 지정한다. 에스테르가 사망한 뒤 모친의 유산을 물려받은 에바를 상대로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이 소송을 제기한다. 소송은 몇 가지 점에서 카프카의 작품만큼이나 부조리했다. 이스라엘은 독일어로 글을 쓴 카프카의 작품에 별 관심이 없었다. 독일인들도 소송전에 끼어들었는데, 그들은 “히틀러와 괴벨스의 허무주의적 악다구니로 오염되기 전의 독일어를” 되찾아 홀로코스트에 대한 면죄부를 얻고 싶어 했다.

정작 카프카 자신은 독일어로 사고하고 독일어로 글을 썼으며,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를 가장 존경하는 문인으로 꼽았다. 동시에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보수·진보 함께 일군 미국 정치질서 조명

뉴딜과 신자유주의

게리 거스틀 지음 | 홍기빈 옮김 | 아르테

1930년대 태어나 1970년대 막을 내린 뉴딜은 진보, 뉴딜을 이어 기세를 떨치다 2010년대 막을 내린 신자유주의는 보수의 의제로 흔히 여겨진다.

케임브리지대 역사학과 게리 거스틀 교수는 다르게 판단한다. 뉴딜은 민주당의 의제를 공화당이 이어받아서, 신자유주의는 공화당의 의제를 민주당이 묵인해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지배 질서는 진보나 보수, 좌나 우, 민주당이나 공화당 등 한 세력의 추동이 아니라, 양 세력의 ‘묵종’에 의해 승인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를 구축한 건 1980년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지만, 이를 확실히 받아들인 이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무역 그리고 자본, 재화,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높게 받드는 신조”이자 “세계시민주의를 문화적 성취로 여겨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는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이후 완전히 끝났다.

트럼프 2기가 시작되려는 지금, “다음에 나타날 질서”가 궁금하다면 과거 ‘정치 질서’에 대한 혜안을 보여주는 이 책을 읽어도 좋겠다.

혼돈의 이데올로기 속 두 청년이 겪는 삶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소설가 김기태는 2020년대 한국 문학의 신성으로 주목받으며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작가다. 그의 첫 소설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는 표제작을 비롯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한 ‘세상 모든 바다’ ‘보편 교양’ 등 9편의 단편이 실렸다.

대개의 작품은 어딘가에서 마주쳤을 법한, 혹은 우리 자신이기도 한 평범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들이 어떤 사건들을 마주한 후 고민하고 변화하고 나아가는 과정들은, 탄탄한 설정과 흡입력 있는 문장이 더해지면서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현재의 삶과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건과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변형되고 이어져 오늘날의 평범한 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출발해 한국의 ‘권진주’ ‘김니콜라이’라는 두 청년의 이야기에까지 이른다. 억지스럽지 않은 낙관을 내비치며 독자로 하여금 가능한 희망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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