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라는 말을 요즘 들어보신 적 있나요? 간단한 짐을 보자기로 싸서 묶은 뭉치 말입니다. 보따리는 그 모양만 떠올려도 애틋하고, 한국 사람만이 이해할 것 같은 정서가 그 안에 담긴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보따리’라는 말을 모국어처럼 또박또박 발음하는 프랑스 사람을 만나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미술가 김수자(68)의 전시를 보기 위해 지난해 파리 ‘피노 컬렉션 미술관(부르스 드 코메르스)’을 찾았을 때입니다. 당시 작가에게 ‘카르트 블랑슈(전권 위임)’ 프로젝트를 맡긴 엠마 라빈 피노 컬렉션 미술관장은 “2016년부터 김 작가와 함께 여러 작업을 해왔다”며 작가의 ‘보따리’ 작업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당시 작가는 ‘호흡-별자리’라는 제목 아래 이 미술관의 상징적인 공간인 1층의 원형 로툰다 전시관과 24개의 쇼케이스, 지하 공간을 그의 작업으로 채웠습니다. 특히 19세기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천장 아래 지름 29m의 원형 전시장 바닥을 418개의 거울로 뒤덮어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김수자의 ‘보따리’가 먼 나라에서 “건축적으로 펼쳐진”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의 보따리가 길을 떠나 이렇게 세계에서 주목받는 예술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1957년생인 김수자는 회화·바느질·설치·퍼포먼스·영상 등을 넘나들며 현재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1992년경 우연히 천 재료를 싸서 보관했던 보따리가 “하나의 조각, 회화”처럼 느껴졌다는 그의 손길을 거쳐 보따리는 그렇게 세계에 말을 건네는 회화이자 조각, 그리고 퍼포먼스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왜 보따리입니까. 지난해 그를 만났을 때 물었더니, 그는 “보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소유물이자 과거의 한 묶음”이라며 “항상 떠날 채비가 돼 있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미래의 상징이기도 하다”고 답했습니다. 무엇이든 하나로 묶고 감쌀 수 있는 보따리처럼 그의 작업은 이주, 정체성, 피난, 정체성, 삶과 죽음 등의 화두를 포용하며 예술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그의 보따리는 그동안 먼 여행을 했습니다만, 지금 국내에서 10년 만에서 서울에서 그의 작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삼청동 선혜원(鮮慧院)에서 열리는 전시 ‘호흡-선혜원’(예약제, 무료)에서 전통 한옥 건물인 경흥각에 설치된 ‘호흡’ 연작과 더불어 대표 연작 ‘보따리’ 등 총 4개 작품 11점을 소개합니다. 선혜원은 본래 SK 창업 회장의 사저였던 곳으로, 직원 연수원과 영빈관으로 활용되다가 최근 새 단장을 마치고 일반에 처음 공개됐습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가 이끄는 온지음 집공방이 한옥 공간을 기획·설계하고, SKM과 BCHO(조병수 건축사사무소) 등과 협업해 완성한 건축물과 함께 김수자의 작품을 직접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10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