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연 판사가 놓친 ‘뱅갈로어 준칙’

2025-05-21

“그런 데서 사진을 왜 찍어서….”

지귀연 부장판사의 고급주점 접대 의혹에 대해 지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룸살롱 느낌의 장소에선 일반인도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서다. 수백만원대 접대 금액이나 모자이크 인물은 이미 관심 밖이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사진을 찍지 않았겠느냐는 일말의 동정심은 보이지 않는다. ‘삼겹살에 소맥 마시는’ 서민들의 반응은 이렇게 냉소적이다. 한순간에 형사법정 피고인 취급을 받는 판사가 안쓰러울 정도다.

정체불명 사진 한 장 법원 신뢰 타격

판사에게 엄격한 행동준칙 둔 이유

합리적 관찰자 눈으로 자신 살펴야

가혹하다 싶은 도덕률이 적용되는 것 같지만, 이는 한국의 판사들만 겪는 일이 아니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 법관들이 윤리 교과서로 여기는 ‘뱅갈로어 법관행동준칙(The Bangalore Principles of Judicial Conduct)’은 판사의 친목 활동이나 취미 생활까지 규율한다. 이 준칙은 제3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각국 대법원장과 고위 법관들이 유엔 후원을 받아 만든 것이다. 2001년 인도 뱅갈로어(방갈로르의 영어식 표기)에서 윤리강령의 초안이, 이듬해 네덜란드 헤이그 원탁회의에서 준칙이 완성됐다. 여기엔 판사의 핵심 가치 6개(독립성, 공정성, 청렴성, 적절성, 평등, 능력과 성실성)와 이를 구현하기 위한 행동원칙이 정리돼 있다. 2007년엔 221개 항의 주석을 보완했다.

일례로 ‘공중 술집 등에의 출입(Visits to public bars, etc)’ 조항엔 술집에 갈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상황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관에게 술집 등에 출입하지 말도록 요구할 수는 없지만,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법관은 예를 들어 방문 장소의 평판,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곳인지 여부 등에 관해 공동체의 합리적인 관찰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반응으로 볼 때 지귀연 판사는 ‘공동체의 합리적인 관찰자의 관점’을 놓친 셈이다.

뱅갈로어 법관행동준칙이 한국에 도입되는 과정에도 공동체의 관점을 반영한 웃지 못할 뒷얘기가 있다. 한국 사법부는 2007년 준칙 번역에 착수했다. 모든 판사에게 배포할 계획이었다. 2006년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금품 수수 비리로 사법부가 발칵 뒤집힌 뒤 판사 감찰 강화와 함께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법원행정처가 준칙 배포를 유보한 건 당시 법조계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엄격한 내용 때문이었다. 양주와 맥주로 만든 폭탄주가 서초동 법조타운의 밤 문화를 상징하던 시절 아니던가. 법조 비리를 없앤다며 지키지도 못할 행동준칙을 배포했다가는 욕먹을 게 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뱅갈로어 법관행동준칙은 수년 뒤 한국의 모든 판사에게 배포됐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법부가 더 청렴해졌고, 도덕적 자신감도 붙었다는 방증이다. “접대받는 시대가 아니다”는 지 판사의 항변도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가 찍힌 사진이 2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법관행동준칙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술집에 가는 것도, 사진 찍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 판사는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가. 뱅갈로어 법관행동준칙은 한 대법원장이 신임 판사들에게 한 연설문을 통해 판사가 살아가는 법을 안내한다. “… 여러분의 법적인 언행, 그리고 다른 언행들 역시 공공의 비판을 받을 것이고, 정당하지도 않고 답할 필요도 없는 공격으로 인해 사법부에 대한 공공의 존경에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루를 마치면서 여러분이 높이 평가하는 나의 동료와 함께 법에 따른 정의의 집행으로 공동체에 봉사한다는 느낌을 나눌 수 있다면, 여러분은 아주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선하고 명예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모든 일이 잘 풀려갈 것입니다.”

판사는 외롭게 사회에 봉사하는 엘리트다. 외로움을 위로해 줄 사회의 신뢰, 특권 의식을 제어할 회초리가 모두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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