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건 안타깝지만 이건 아니지. 세금으로 왜 보상해줘? 나라를 위해 순직한 것도 아니고 서양 귀신 축제에 술 퍼마시고 놀다가 죽은 건데…” 2022년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자, 포털 뉴스에는 이처럼 희생자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댓글이 넘쳤다. 작년 제주항공 2216편 사고 때도 “유가족들만 횡재네요. 보상금 받을 생각에 속으로는 싱글벙글일 듯”이라는 악성 게시물이 어느 인터넷 동아리에 게시되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참사 피해자에 대한 모욕을 근절할 전담 수사팀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유감스럽게도,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재난을 당한 피해자를 종종 비난한다. 피해자가 부주의했다거나, 앞뒤를 잘 헤아리지 못했다거나, 가해자의 폭행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등의 이유를 들면서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라고 비웃는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이 대유행했을 때 에이즈에 걸린 환자, 특히 동성애 환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분별없는 언행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자초했다고 믿는 유럽인이 아직도 많다.
왜 우리는 변고를 당한 피해자를 향해 비난을 퍼부을까? 위로해주기 싫으면 그냥 예의 바르게 가던 길을 가면 되지 않나? 진화심리학자 파스칼 보이어는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끼리 서로 협력하게끔 진화한 인간 본성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본다.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느닷없이 질병이나 사건·사고로 인해 크게 다치거나 앓아눕는 일은 흔하디흔했다. 병원도, 보험도, 사회안전망도 없던 시절이다. 오직 피해자가 기댈 구석은 다 나을 때까지 혈연, 친구, 동료 같은 주변 이웃이 자신을 먹여주고 지켜주고 배려해주는 것뿐이었다.
피해자에게 닥친 재난은 주변 이웃에게 딜레마를 안긴다. 먼저, 이웃 자신이 누구를 파트너로 골라야 할지 생각해 보자. 이웃의 관점에서, 큰 고초를 겪어 피폐해진 피해자는 앞으로 상호 협력의 과실을 함께 나눌 듬직한 파트너가 되기 어렵다. 오늘 그를 성심껏 돕더라도, 내일 그가 말끔히 회복되어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자기 몫을 다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웃 자신이 어떻게 자기 평판을 관리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이웃의 관점에서, 만신창이가 된 피해자를 선뜻 도와주는 모습을 남들 눈앞에서 연출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아무개는 따뜻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야!”라는 좋은 평판을 유지해 나중에 남들로부터 상호 협력의 파트너로 선택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주변 이웃은 피해자를 도우면 안 된다. 내가 그를 돕느라 치른 비용이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주변 이웃은 피해자를 도와야 한다. 도와주길 거절하면 그동안 내가 쌓아 올린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변고를 당한 피해자의 이웃은 어떻게 이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결책은 피해자가 조심성 없고 부주의해서 재난을 어느 정도 자초한 책임이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피해자를 구제하려는 공동체의 노력에 동참하지 않으면서도, ‘관대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떨어지는 사태는 떳떳이 피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피해자 비난은 피해자가 도움받을 자격이 없음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내가 피해자를 돕는 짐을 지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노파심에 덧붙이자. 과학은 피해자 비난이라는 범죄가 왜 일어나는지 설명할 뿐이다. 결코 그 범죄가 정당하다는 면죄부를 발행하지 않는다.
보이어의 가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재난을 당한 피해자의 성품을 깎아내리는 정도는 피해자가 장차 자신과 협력할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 사람들 각자가 평가하는 바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학술지 ‘인간 본성’에 게재한 연구에서 보이어는 운전 중 휴대전화로 통화하다 사고를 내서 차를 폐차하게 된 어느 서민의 이야기를 실험 참여자들에게 제시했다. 예측대로, 피해자의 성품을 낮게 매긴 참여자일수록 참여자 자신이 나중에 피해자와 함께 협력할 의향이 더 낮았다. 특히 이웃에게 새 차를 사달라고 요청한 피해자는 그간 모아둔 저축으로 새 차를 산 피해자보다 성품이 더 나쁘게 매겨졌다.
피해자 비난은 먼 과거의 소규모 공동체에서 협력에 내재한 딜레마에서 나온다는 가설을 살펴보았다. 이 가설이 맞다면, 특히 이태원, 세월호 사건 등 사회적 대참사의 희생자에 대한 조롱과 비난은 현대 사회의 거대한 복지와 먼 과거의 소소한 도움이 똑같다고 여기는 인간 마음의 진화적 한계에서 기인하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