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중순, 서울 종로의 서울대병원.
김상중 형사는 조폭계에서 끗발이 센 노인과 함께 3층 내과계 중환자실을 찾았다. 범서방파의 두목 김태촌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노인이 어떤 연유로 김태촌과 인연을 맺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강남 일대의 유흥업소 여럿을 운영하며 조폭들과 안면을 텄다는 소문은 무성했다. 말하자면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지대에서 돈 많은 원로쯤으로 대우 받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고개 숙이면 뺨 맞는다는 업계 불문율에도 이들이 대기실에 들어서자 조폭 몇 명이 노인을 알아보고 금세 인사를 해왔다. 큰 형님 병세가 어떠냐는 물음에 “곧 좋아지시지 않겠습니까”라며 사견은 피했다.
김태촌은 오랜 지병인 폐암이 몸을 완전히 잠식하며 수술을 몇 차례 거쳤음에도 호전이 안 돼 이제는 중환자실에서 임종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런 탓에 조직에서도 2선으로 밀려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표면상 그런 것일 뿐 국내 최대 조직인 범서방파의 최초 보스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모르는 와중에도 막후 실세로 대접받고 있었다.

1인실 병상에서 김태촌은 등을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남들 눈에 의연함을 내보이려는 듯했으나 거목이라기보다 비석처럼 초라한 기운이 느껴졌다. 폐 하나를 잘라낸 것도 모자라 남은 폐마저 쇠락했으니 얼굴이 흑색을 띠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노인과 김태촌이 간만의 인사를 나눌 때까지 김상중 형사는 기다린 뒤 질문을 던졌다.
“칠성파와의 전쟁에 개입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김태촌의 눈에 안광이 드러난 것도 잠시 그는 형사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교도소에서 나오기 며칠 전에 벌어진 건데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러고는 인간사 생로병사에 불과해 허무하다. 다른 뿌리에서 태어났다면 좋은 일을 하고 살았을 거라고 의외의 회한을 내비치며 물러가 달라고 했다.

이듬해인 2013년 1월 5일 김태촌은 심장마비 증세를 보인 끝에 6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은 그의 숨이 꺼질 때까지 지켜본 범서방파 조직원 40여 명과 유족들로 가득했고, 김태촌의 시신이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안치를 위해 엘리베이터로 옮겨질 때 한 유족은 오열하다 풀썩 쓰러졌다.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만일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광역수사대(이하 ‘광수대’) 형사2계의 조폭팀은 장례식장 내외부에서 범서방파 조직원들의 얼굴과 행동거지를 살피고 있었다.
2009년 11월 11일 범서방파가 서울 청담사거리 호텔 앞에서 칠성파와 회칼을 들고 대치해 전쟁 직전까지 갔던 사건을 2년 넘게 내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합 230명에 달하는 조폭들이 서울 한복판을 점거했으나 경찰의 중재로 유혈전만은 가까스로 막아냈다. 문제는 경찰의 역할이 딱 거기까지였다는 것이다.
“조직원 한 명이라도 검거해야 했다. 공무집행 방해, 총검법 위반, 불법 도박장이나 대부업 운영 등 닥치는 대로 죄목을 적용해 끌고 왔어야 했지만 손 놓고 있을 뿐이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치안을 깡패 새끼들이 범하려 했는데 넋 놓고 풀어주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당시 광수대 형사의 증언)
그 결과 경찰은 조폭을 무서워한다는 비아냥만 확산됐다. 더불어 범서방파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인식돼 조폭계에서 그들의 위세만 살려준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