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피고인들보다 ‘부정선거’에 민감했던 사람입니다. 재판장님의 최대 재량으로 선처를 해주시면….”

지난달 19일 오후 3시39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4층의 한 법정. 녹색 수의를 입은 한 남성이 교도관의 안내를 받아 법정에 들어섰다. 재판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남모(36)씨는 덤덤한 표정으로 피고인석에 앉았다. 그는 이날로부터 2개월 전, 이곳에서 벌어진 헌정사 초유의 서부지법 ‘폭력 사태’에 가담해 이 자리에 섰다.
그는 1월19일 새벽 내란 수괴 혐의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으로부터 발부되자, 시위대와 함께 서부지법에 난입했다. 경찰에게 빼앗은 방패로 법원 건물 외벽 타일을 부수고, 소화기를 집어 들어 법원 1층 당직실 창문에 던져 깨부쉈다. 벨트형 차단 쇠봉을 휘둘러 1층 벽에 걸려 있던 유리문과 서예미술품 액자까지 파손해 특수공용물건손상 등 혐의를 받는다.

◆‘법원 난동 사태’ 피고인 “부정선거 참담함에 범행”
이날 남씨 측은 법원 난동에 관한 범죄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다만 “‘부정선거’로 인한 참담한 심정을 참지 못해 범행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남씨 측 변호인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재판부를 향해 “검찰의 공소 사실을 피고인이 모두 인정한다”면서도 “부정선거로 인해 국회가 장악되고 대통령까지 인권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남씨 측은 판사에게 부정선거 증거를 담았다는 자료까지 제출했다. ‘가짜 투표함’, ‘투표율 조작’ 의혹 등이 담긴 이 자료는 수백 쪽에 달했다. 재판 내내 고개를 숙였던 남씨도 변호인의 이런 주장에 감정이 복받친 듯 울먹였다. 남씨는 재판을 맡은 박지원 부장판사가 “피고인도 (변호인의 말에) 동의하시나요”라고 묻자, 마이크에 다가가 “네”라고 힘주어 답했다.
경기 안산에 거주하는 평범한 자영업자인 그는 어쩌다 수의를 입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게 됐을까.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의심은 결국, ‘법원 난동범’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남씨가 부정선거 의혹을 의심하기 시작한 건 지난 2022년 3월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다. 윤 전 대통령이 당선된 이 선거에서 당일 오후 8시쯤 인천 부평구 개표소인 삼산월드체육관 주차장에서 ‘가로세로연구소’ 등 일부 유튜버들이 투표함 이송을 가로막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누군가가 투표함을 들고 옮겼다”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고, 순식간에 수백명이 투표함 주변으로 몰려 대치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남씨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대치 사태를 라이브 방송으로 지켜봤다. 심각성을 느낀 그는 밤 중 거주지에서 30㎞가량 떨어진 그곳으로 향했다. 남씨는 변호인을 통한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검증도 안 된 투표함이 오가 시민들과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유튜브 실시간으로 봤다. 현장에 갔지만, 경찰과 대치 속에 체육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남씨는 본격적으로 부정선거 의혹에 빠졌다. 성토만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직접 ‘참관인’ 자격으로 감시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황교안 전 총리가 대표를 맡은 ‘부정선거방지대’에 가입해 참관인 교육까지 받았다. 이후 남씨는 지난해 4월 제22대 총선에 참관인으로 참여했다. 거주지인 경기 안산의 한 사전투표소에서 참관한 그는 투표자 수를 세는 역할을 했다. 다른 참관인과 조를 이뤄, 한 명은 ‘정(正)’자를 그리고, 한 명은 계수기를 누르며 투표자 몇 명이 오는 지 세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남씨가 사전투표소에서 직접 집계한 투표자 수와 비교해 추후 선관위의 발표가 80명이 초과했다. 남씨가 들어간 방지대 단체 대화방에선 “다른 안산의 투표소는 800표 차이가 났다”는 글도 올라왔다.

◆“난동 반성…선거제는 바꾸자”
그렇게 남씨의 부정선거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참관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의석 절대다수를 차지하자, 그들에 대한 반감만 커졌다. 총선 이후 벌어진 정국은 남씨의 분노를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만들었다. 남씨 측 변호인은 “민주당의 ‘줄탄핵’에 이어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 그리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불법 수사’가 이어지면서 남씨가 참담함과 좌절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러던 중 법원의 윤 전 대통령 구속영장 발부 소식에 남씨는 법원으로 달려갔고, 사법 체계를 위협하는 난동에 가담하게 이르렀다. 그는 이제 서울 남부구치소에 수감돼 판결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였다.
변호인은 “(남씨가) ‘어떻게 이런 일을 다 했지’라면서 눈물만 흘렸다. 난동 사태에 가담한 걸 반성하고 있다”면서도 “부정선거를 의심한 이력도 있어 대통령 구속 소식에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나라를 점점 망친다며 속상해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는 그는 여전히 부정선거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법원 난동 때 행한 폭력 행위에 대한 반성과는 별개로 신념을 굽힐 순 없다. 오히려 법정에서 주장했듯, 선처의 요인으로 참작해주기를 재판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는 심지어 본지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선거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씨는 “투표함을 이동하지 말고, 투표한 곳에서 수개표를 하자. 집계는 수치를 전송하면 되지 않나”라면서 “그러면 투표지로 그 자리에서 서로 얼마나 투표하고, 득표했는지 알 수 있다. 초등학교에서 반장 선거하듯이 하면 이런 논란이 없지 않겠나. 넓은 체육관 같은 곳에서 하는 개표는 결국 ‘쇼’”라고 전했다.

올해 초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법원 난동 가담자 중 남씨처럼 ‘부정선거’를 거론하는 이가 적지 않다.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사랑제일교회의 특임전도사 윤모(56)씨도 첫 공판에서 “부정선거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재판부가 부정선거 의혹부터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성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윤씨는 난동 당일 법원 출입문 셔터를 손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진입을 막기 위해 대기하던 경찰을 위협하기도 했다. ‘부정선거’라는 음모론은 그 씨앗을 키워, ‘법원 침입’이라는 폭력 사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음모론의 시대’를 쓴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부정선거 음모론은 믿는 이들로 하여금 명분이 된다. 이에 근거해 폭력적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서 “특히 부정선거 관련 음모론은 독특한 지위가 있다. 민주주의 토대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선거라는 건 투표로 대리자를 뽑는 건데, 이를 뒤흔들면서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전 교수는 “본래 정치에서의 적은 타협의 대상인데, 한국 정치사회에서의 적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대화가 아닌 ‘생사(生死)’를 다투기 위해 처리할 대상이 됐다. 그래서 헌법기관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한서 기자 jh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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