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박정규 기자) 지난 80년대 중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 서울 종로와 을지로, 명동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맨몸으로 군부독재와 맞섰던 청년 학생들은 가두투쟁이 끝나면 어김없이 민중가요 ‘광야에서’, ‘아침이슬’ 등을 부르며 집회를 마무리하곤 했다.
이때로부터 약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달 15일, 그때의 청년 학생 아홉 명이 중국 만주 벌판 광야에 섰다. ‘현재를 도운 또 다른 과거’를 만나기 위해서다.
옌지공항을 통해 만주에 도착한 일행의 첫 행선지는 詩를 ‘무기’로 삼은 항일 저항 시인 윤동주와 송몽규 독립투사의 묘소였다.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계속되는 비로 산길은 진흙길로 변해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진입한 일행의 차는 끝내 진흙에 빠졌다. 너나 할 것 없이 차에서 내려 밀어야 했고, 진흙길을 겨우 헤쳐 나온 차를 버리고 일행은 걸어서 묘지에 도착했다.
북간도 용정의 동쪽 외곽에는 ‘영국더기’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언덕이 있다. 일제 강점기, 영국 국적을 가진 캐나다 선교사들이 살던 동네다. 보잘것없던 시골 이곳에 은진중학교, 동산교회 등의 건물이 지어졌고, 이후 항일 민족 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시인 윤동주의 묘지는 작고 초라했다. 주변에는 봉분이 꺼진 수많은 무명의 묘가 가득했다. 간혹 십자가가 새겨진 묘비들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이곳이 옛 동산교회 묘지 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묘에서 약 30여 m 떨어진 거리에 윤동주의 친구이자 고종사촌형 송몽규 선생의 묘가 더욱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송몽규 선생은 윤동주의 사촌형이자 친구다. 둘은 함께 자랐고, 함께 대성학교에 입학했으며, 함께 일본으로 유학 가서 항일 운동에 종사한 동지다.


그들은 일제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 함께 투옥되었으며, 수감 기간 잔인한 생체 실험에 시달리다 그 후유증으로 윤동주 시인이 사망한 지 21일 만에 송몽규 선생도 뒤따라 죽게 된다. 그들은 평생 친구이자 형제였으며, 항일 투사로서의 동지이자 운명 공동체였다.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선생의 생가 터를 둘러본 뒤, 명동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면서 이름 없이 항거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수많은 항일 투사들의 한이 떠올라 마음 한켠이 날카로워졌다.
이곳 명동학교는 은진, 광명, 대성학교 등이 통폐합되어 지금은 용정중학교로 불리고 있다.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투사, 평생을 조국 통일 운동에 앞장섰던 故 문익환 목사(배우 문성근의 아버지) 등이 같은 시기 이곳 명동학교를 다녔다.
이번 여행의 리딩 자격 왕초 선생으로부터 중국 학자들 입장에서의 간도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심과 분노가 일었다. 동북공정은 동북변강 역사현장 연구공정이라는 말로 2002년부터 중국 사회과학원 주도로 추진되었다.
옛 만주인 중국 동북지방(현재의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의 역사·민족·영토를 중국 역사 체계 안에 편입시켜 고구려, 발해, 간도 지역의 역사와 인물들을 중국의 지방사로 규정하는 내용이다.
시인 윤동주와 동북공정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담론 속에서 윤동주가 언급된 적이 있어 논쟁이 된 바 있다. 윤동주는 1917년 중국 지린성 용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와 활동 무대가 중국 동북 3성 중 하나였다는 이유로 일부 중국 학자들은 윤동주를 ‘중국인 시인’ 또는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조선 국적을 지녔으며, 그의 시 세계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윤동주가 조선 국적이었다는 것은 여러 역사 자료와 제도적 배경을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윤동주가 다닌 명동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의 학적부에는 그의 국적이 ‘조선’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 유학 시 제출한 여권 및 유학생 신원 조사서에도 국적란이 ‘조선’으로 기재돼 있다. 1943년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 입학 시에도 ‘조선인 유학생’ 신분으로 등록됐다.
당시 중국의 국적법(1929년 중화민국 국적법)에 따르면, 중국 국적은 중국인 부계 혈통 또는 귀화 절차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윤동주는 조선인 부계 혈통이었으며, 중국 귀화 절차를 밟았다는 기록이 현재까지 없다.
시인 윤동주가 1936년 1월 6일에 지은 시다. 윤동주는 이 자작시에서 경성에 가기 전까지 만주가 아닌, 만주의 남쪽에 위치한 한반도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밝히고 있다.
회갑 기념으로 이번 여행에 합류한 의료기기 사업자 김치평 대표(60세)가 최근 논란이 된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취지의 대선 후보 발언을 화두로 꺼내 저녁 술자리 논쟁거리가 되었다.
영토·국민·주권, 즉 국가의 3요소를 논거로 일본 내지인(內地人)과 구별된 식민지적 신분을 주권이 있는 국민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귀결로 토론이 마무리됐다. 이번 여행의 동행자인 또 다른 의료기기 사업자 조규복 대표(60세)와 법무법인 통문 대표인 형창우 변호사(60세)도 속내가 복잡한 듯 보였다.
일제 밀정 밀고로 15만 위안 탈취 사건 무위로
일행은 일제강점기 ‘15만 위안 탈취 사건 유적지’가 있는 지린성 류허현에 도착했다. 15만 위안 탈취 사건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무장 투쟁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인 항일 비밀결사조직 철혈광복단이 일본의 철도 시설 자금 15만 위안(현재 가치 약 150억 원)을 탈취한 사건이다.


최봉설·윤준희·임국정·한상호·김준·박웅세 등 여섯 명의 결사대에 의해 15만 위안을 빼앗긴 일본군은 발칵 뒤집혔다. 애석하게도 일본의 밀정에 의해 결사대원들이 모두 밀고되고, 최봉설 선생을 제외한 모든 대원이 체포되어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결국 항일 무장 투쟁의 무기 구입비로 쓰일 예정이었던 탈취 자금은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다시 넘어갔다. 만약 이 탈취 자금이 우리 독립군의 무장에 사용되었더라면, 우리 민족의 항일 무장 투쟁사는 전혀 다른 흐름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설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안타깝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일행은 1919년 길림성 훈춘시에서 전개된 3·1 만세 운동을 하다가 순직한 열사들을 기리는 ‘훈춘시 3·15 열사들의 묘소’에 도착했다. 이 만세 운동에 참가했던 나이 어린 청년들은 대부분 성인이 되어서도 항일 독립투쟁에 앞장서는 투사가 되었다는 왕초 선생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중국의 피카소 ‘한낙연 화가’, 조국에서는 무명인
일행이 곧이어 도착한 곳은 용정시에 위치한 락연공원. 이 공원은 화가이자 항일독립운동가, 역사문화유산 연구자이자 공산주의자인 한낙연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 그의 중국 공산당 가입 이력 때문이었을까? 우리에게는 그 이름조차도 낯설 정도로 그 위상이 저평가돼 왔다.
서양화와 동양화, 민족주의 예술을 융합한 그의 독창적인 화풍은 중국 실크로드 문화유산 보호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그의 이름이 중국에서는 ‘중국의 피카소’, 천재 화가로 불릴 정도로 추앙받고 있다. 선택의 문제인 이데올로기, 이념과 체제의 문제가 우리를 지배하는 아이러니의 하나다.

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투지, 호랑이 출몰 입산 금지
이어서 도착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유적지에서도 마찬가지 생각이 들었다.
최근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문제가 논란이 됐다. 홍범도 장군이 동포 농민들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선택한 소련 공산당 가입 경력 문제가 흉상 철거의 이유로 회자된 바 있다. 아들과 부인마저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총지휘관이 되어 대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그의 별명이 ‘백두산 호랑이’였던 탓일까? 봉오동 전투 유적지에는 ‘호랑이 출몰 및 저수지 수원 보호’ 명목으로 철문이 설치되어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장백산 북파, 남파, 서파 코스를 오르내리고, 두만강·압록강 주변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역을 따라 내려오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지던 답답함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현재’를 살린 ‘과거’가 너무도 푸대접받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광활한 옥수수밭을 지나 도착한 지안(集安)의 고구려 유적지와 광개토대왕비, 호태왕릉(광개토대왕릉), 장군총(장수왕릉), 고구려 환도산성 유적지 등에서 ‘가슴 벅찬 호연지기를 맛보았다’는 동행자들의 후담조차도 여운이 그리 길지 않았다.
선택의 문제일 뿐인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숨이 막혔던 탓이었을 게다. 단둥으로 가는 압록강변 길.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바로 눈앞의 북한 땅에서 뱀을 잡아 흔들던 북한 인민군의 모습과 제방 공동작업을 하는 북한 주민들의 바쁜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압록강 단교 주변 새벽에 핀 안개만큼이나 필자의 속마음이 뿌옇고 흐렸다.
눈이 시리게 푸른 빛 ‘천지’를 품은 백두산은, 춥고 두렵고 배고픈 광야에서 어깨 울음을 지었을 그 항일 투사들의 깊은 속내를 알았을까?
독을 지닌 백두산의 야생화 ‘두메양귀비’는 그때에도 여전히 이렇게 예쁘게 피어났을까?
호사스럽고 불경스러운 궁금증이 한편으로 부끄러우면서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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