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이 있는 11월, 만 65세가 된 나는 주민센터에 가서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카드를 발급받았다. 이제 국가가 인정하는 ‘어르신’이 된 것이다. 무슨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아닌데 그 카드를 들고 인증샷을 찍은 후 지인들에게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어르신의 세계에 도착한 나 자신이 기특해서다. 다양한 답문자가 왔는데 “어르신이 될 때까지 귀여운 걸 축하해”란 딸의 문자가 마음에 들었다.
65년을 살면서 온몸이 폐허가 되고(쓸개 제거 수술을 받은 쓸개 없는 인간에 천식·돌발성난청 등등) 내가 그동안 먹은 밥그릇 수만큼이나 실수와 시련, 고통도 차곡차곡 쌓아왔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이 드는 것이 억울하다거나 서글프지 않다.
하지만 예전처럼 노인의 지혜, 경험이나 연륜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시대에 어르신은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살아야 하나 의문이 든다. 곰곰 생각하니 결론은 단순했다. 평소 내가 직간접으로 만난 어르신들 가운데 근사하다, 다시 만나뵙고 싶다고 느꼈던 분들의 장점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진짜 어르신은 아랫사람을 다듬기보다 보듬는 분들이다. 누가 실수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지적하기보다 포용하고 너그럽게 안아줘야 한다. 잘못한 일로 자기 엄마에게 야단을 맞아 우는 손주에게 “그럴 수 있어, 괜찮아”라며 다독거리는 할머니처럼 말이다. 영어에 ‘젖은 담요(wet blanket)’란 말이 있다. 즐거운 분위기를 방해하거나 항상 기분 나쁜 말만 일삼는 사람을 뜻한다. 수시로 짜증을 내고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늘어놓거나 불길한 예측만 하는 이들이 그 주인공이다.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가까이 하기 싫은 이유는 그분들이 늙어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말을 늘어놓고 자기주장만 고집하기 때문은 아닐까. 젖은 담요가 아니라 보송보송한 수건이 되어 젖은 몸과 마음을 말려주는 것이 어르신의 역할이다. 그 수건에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들이 수놓아 있다.
내가 만난 멋진 어른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소소한 일에도 “고맙다” “감사하다”란 말과 표현을 잘한다는 것이다. “바쁠 텐데 안부 전화해줘서 고마워” “꼭 필요한 물건인데 어떻게 알고 사왔어? 감사해요” “별것도 아닌 내 김치를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니 내가 더 고맙네” 등 미소 지으며 감사를 전한다. 10여년간 치매를 앓던 우리 엄마는 말년엔 내 이름도 잊어버리셨지만 내가 안아드리거나 과자라도 드리면 “고맙다”란 말씀은 잊지 않으셨다. 그 말씀에 모든 피곤과 아픔이 사라졌다.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 없이 나는 이제 주변 사람들을 보듬어주고, 환한 미소를 자주 짓고 수시로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귀여운 어르신으로 늙어가야겠다. 나의 좌우명인 ‘가늘고 길게 가볍고 기쁘게’를 온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어르신이 된 내 자신에게 감사하다.
유인경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