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3주년 기획] 탄소가 ‘비용‘ 되는 시대…수출 경쟁력 흔드는 녹색 장벽

2025-08-25

“탄소는 더 이상 공짜가 아니다.”

국내 철강과 알루미늄 업계 관계자들이 요즘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그동안 공기처럼 소비되던 탄소가 이제는 수출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지난해 10월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때문이다. 지금은 단순히 제품의 탄소배출량을 보고하는 전환기에 불과하지만, 2026년부터는 실제 배출량만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사실상 탄소세를 부과하는 구조다. 한국 기업들로서는 ‘탄소가 곧 비용’이 되는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셈이다.

◇ 신고에서 납부로…탄소 비용 현실화

CBAM의 일정은 뚜렷하게 나뉜다. 2023년 10월부터 2025년 말까지는 전환기다. 이 기간에는 EU 수입업체가 제품별 탄소배출량을 분기마다 신고만 하면 된다. 금전적 부담은 없다. 그러나 2026년 1월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수입업체가 배출량에 비례해 ‘CBAM 증서’를 구매해 제출해야 하는데, 이 증서 가격은 EU 배출권거래제(ETS) 가격과 연동된다. 다시 말해 EU 내부 기업이 ETS로 지불하는 탄소비용을, 역외 기업도 동일하게 부담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보고 방식도 점차 엄격해진다. 지난해 7월부터는 실제 배출 데이터 제출이 의무화됐고, 올해 1월부터는 EU가 인정한 공식 산정방식만 허용된다. 그동안 평균치에 해당하는 기본값을 활용해 낮게 보고하던 방식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최근 유럽의회는 연간 수입 물량이 50톤 미만인 소규모 기업을 CBAM 대상에서 제외하는 개정안을 승인했지만, 최종 확정까지는 논의가 남아 있다.

◇ 한국 수출 산업의 취약한 현실

한국 경제는 GDP의 절반 가까이를 수출에 의존한다. 문제는 EU가 CBAM 적용 대상으로 지정한 품목들이 한국의 주력 산업과 겹친다는 점이다.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알루미늄 등이 대표적이다.

철강업계는 위기감을 감추지 못한다. 제철 과정에서 석탄을 환원제로 사용하는 고로(高爐) 방식은 대규모 탄소배출을 수반한다. 포스코, 현대제철 등은 기술 전환을 추진 중이지만 상용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알루미늄 산업도 상황은 비슷하다. 알루미늄 제련은 전력 다소비 산업인데, 한국 전력의 60% 이상이 여전히 석탄·가스에 의존하는 만큼 배출량을 낮추기 어렵다.

대기업보다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한 곳은 중소기업이다. 자체적인 배출량 산정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기업이 많아, 단순 보고 절차만으로도 상당한 행정비용과 인력이 필요하다. 한 중소 수출업체 관계자는 “대기업은 기술 투자라도 가능하지만, 우리는 배출 데이터를 모으는 것조차 벅차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 탈탄소 전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

CBAM은 단순히 새로운 무역 규제가 아니다. 국제 무역 질서가 ‘가격 경쟁’에서 ‘탄소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미국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청정에너지와 전기차, 배터리 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사실상 녹색산업 패권 경쟁에 뛰어든 상태다.

한국은 여전히 값싼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에너지 구조를 갖고 있다. 과거에는 이 구조가 가격 경쟁력의 원천이었지만, CBAM 시대에는 오히려 수출 부담으로 작용한다. 정부는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탄소배출량을 40%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내놨지만, 업계에서는 “목표는 원대하지만 구체적 로드맵이 부실하다”는 비판이 크다. 탄소 감축 비용을 기업이 전적으로 떠안는 구조라면 실현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는 지적이다.

◇ 수소·CCUS·그린 철강 “기술이 답이다“

궁극적으로 돌파구는 기술 혁신에서 찾아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CCUS(탄소포집·저장), 전기화학 공정 등 차세대 기술이 연구되고 있으나, 상용화까지는 최소 5~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 이미 ‘그린 이노베이션 펀드’를 통해 수소 제철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고, 유럽은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활용해 전력 다소비 산업을 저탄소화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연구개발 투자가 분산돼 있고, 정부의 직접 지원보다는 민간 자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뒤처질 위험이 있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CBAM은 단순히 탄소 비용을 부과하는 무역 장치가 아니라, 산업 패러다임 자체를 강제적으로 전환시키는 수단”이라며 “정부와 기업, 연구기관이 삼각 협력 체계를 구축하지 못하면 10년 뒤 한국의 주력 산업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위기와 기회, 동시에 찾아온 전환점

탄소 규제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전기차, 배터리, 수소,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한국은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쌓아가고 있다. 특히 배터리 산업은 세계 시장 점유율 상위권을 차지하며, ‘탄소 경쟁 시대’의 새로운 먹거리로 부상했다.

국제사회에서도 CBAM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개도국의 수출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EU는 탄소감축 기술 지원과 기금 조성 논의에 착수했으며, 세계무역기구(WTO)는 “글로벌 차원의 탄소 가격 체계가 마련돼야 무역 마찰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녹색 전환이 개별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재편임을 보여준다.

◇ “탄소가 곧 통화인 시대”

앞으로의 국제 무역은 ‘탄소 통화 체제’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는 달러가 교환의 기본 단위였지만, 이제는 탄소 효율성이 그 지위를 대체할 수 있다. 탄소를 줄이는 기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준비해야 할 해답은 분명하다. 탈탄소 전환을 단순한 비용이 아닌 미래 경쟁력으로 인식하고, 산업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창간 23주년을 맞은 지금, 환경은 더 이상 부수적 이슈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경제의 흥망을 가르는 핵심 변수이며, 다음 세대를 위한 생존 전략이다.

“탄소는 더 이상 공짜가 아니다” 이 선언 앞에서 한국 경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다. 지금 투자하고, 지금 전환하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기회는 줄어들 뿐이다.

[ 경기신문 = 오다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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