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에 현기증이 날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드론으로 피자를 배달한다는 외신을 보다 웃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있다. 공중에서 피자를 떨어트리는 드론이 귀엽고 재미있었다. 우크라이나가 전선에서 드론 폭격기를 사용한다는 기사에도 수세에 몰린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심정이 컸다. 그러나 최근의 그 전선에서 나무 뒤에 숨어 공포에 찬 두 눈으로 공중의 드론을 올려다보는 북한 병사의 사진을 보았을 땐 말문이 막혔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낯선 드론의 습격에 방치된 저 병사는 나와 같은 민족이다. 그런데 이렇게 수수방관해도 되는 것일까. 충격과 죄책감이 도화선이 되어 언젠간 그 병사의 공포가 나의 공포, 혹은 인류의 보편적인 공포가 될 수도 있겠다는 SF적 상상력이 문득 나를 사로잡았다. 지금은 전선에서 드론이 공격하는 정도이지만 언젠간 인간을 빼닮은 로봇이 인류를 습격하지 않을까.
한 세기 전인 1920년에 이미 체코 극작가인 카렐 차페크가 ‘R. U. R.’이란 작품에서 그런 고민을 했었다. 로봇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작품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목적으로 대량생산한 로봇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류를 멸종시킨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그 작품에 진보에 회의적인 알퀴스트라는 건축가가 등장한다. 로봇을 만들어내는 진보의 속도에 현기증이 나면 그는 공사판의 비계로 올라가 기도하듯 벽돌을 쌓는다. 벽돌을 손으로 만지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계산으로 하나씩 쌓고 두드리면서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는 진보에 대한 울렁증을 진정시켜 보는 것이다.
연초부터 이제 인공지능으로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젠슨 황의 연설이 회자된다. 그 속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안간힘과 노력이,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당분간 우리를 휩쓸 것이다. 아, 이 진보의 현기증! 가파른 비계 위에서도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듯 감당하게 하소서.
김명화 극작가·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