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의 맨드라미를 보시면...

2024-09-11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9월로 접어들어 아침저녁 공기는 선선해졌지만 이미 중순인데도 한낮은 여전히 30도를 넘어 여름을 벗어나기가 이리 어렵나 하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토하게 한다. 우리들은 늦더위를 참아야 곡식과 과일이 익어 풍성한 가을이 온다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으니 참고 이길 자신은 있다. 더구나 다음 주가 한가위 아니던가? 곡식도 과일도 많이 많이 익어 우리의 한가위가 풍성해서 즐겁고 행복한 명절이 되기를 빌어본다.

지난주 친구 하나가 뜰에 핀 빨간 꽃 사진을 하나 보내준다, 이 꽃은 이쁘고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울퉁불퉁, 삐쭉삐쭉한 꽃잎들이기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데 막상 여름을 다 지나고 이 꽃을 보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맨드라미꽃이다.

시골의 담벼락이나 울 안, 사립문 부근에 많이 피지 않았던가? 도회지에 그런 곳이 없어 이미 꽃을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친구 사진으로 보는구나. 사실 맨드라미는 보기만 해도 덥다. 꽃은 달린 것이 아니라 몸체를 누르고 있는 것 같다. 빛깔도 걸쭉한 붉은빛이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을 생각게 한다. 그러기에 이 꽃은 아름답다고 보기보다는 괴상하다고 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이 꽃에 미안했을까?

봄에 파종을 하면 7∼8월에 꽃이 활짝 피는데 늦가을까지 꽃이 꼿꼿하게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아무 불평도 없이 머리를 꼿꼿이 들고 기개 있게 서 있다. 말하자면 더위와 싸워 이긴 장한 꽃이다. 꽃술의 밑은 서로 달라붙어 넓게 주름이 지기도 하는데 그 모양이 꼭 닭의 벼슬처럼 생겼다고 계관화(鷄冠花), 계두화(鷄頭花)라고도 부르고 영어이름도 cock’s comb, 곧 수탉의 머리빗인데 이 꽃이 여름을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맨드라미의 전설도 예사롭지 않다. 그 어느 옛날, 임금의 신임을 받던 장군이 있었는데 간신들이 장군을 모함하면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군은 간신들의 음모는 깨부수었지만, 자신은 다치서 죽게 되었고 그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 맨드라미란다. 간단치 않은 전설처럼 한여름 최고의 무더위 속에서도 핏덩어리처럼 뻘건 꽃이 머리를 곧추세우고 서 있는 자태는 과연 대단한 장군의 기개를 보는 듯하다. 그런 맨드라미를 지난여름 우리가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미안할 수밖에.

사실 맨드라미야말로 한여름 무더위 속에 피는 관계로 그 덕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볼품은 없지만 이 꽃은 부귀(富貴)의 상징이기에 옛사람들이 뜰 안팎에 많이 심어왔다. 꽃잎을 따서 술떡인 증편(기주떡)에 살짝 얹어 붙여 모양과 색깔을 내고 소주에 담가 빨갛게 우려내면 고운 빛깔로 구미를 돋우기도 하며, 환약이나 가루약으로 만들어 토혈, 출혈, 하리, 구토, 거담, 그리고 여름철에 자주 찾아오는 설사나 이질 등에 처방되기도 한단다.

실제로 맨드라미꽃 말린 것 한 주먹을 물 2홉으로 달여 1홉이 될 정도가 될 때 1일 3회 식간 복용하면 여성의 백대하와 월경불순, 이질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 맨드라미꽃을 줄기와 함께 잎 10g을 말려 가루로 빻은 뒤, 물에 달여 하루에 3번 마시면 사흘 안에 변비가 없어지고, 계속해서 오랫동안 마시면 요통이 낫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약에 익히 길든 도시의 우리가 그러한 효능을 알 턱이 없다.

고려 중엽 때 대시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맨드라미의 공덕을 칭찬한다.

我疑昔者有鬪鷄 의심컨대, 옛날 싸우는 닭이

忽逢强禦至必死 문득 강적 만나 힘을 다해 싸우다가

朱冠赤幘濺血落 붉은 볏에서 피가 흘러내려

錦繡離披紛滿地 화려한 비단 어지러이 땅에 떨어져

物靈不共泥壤朽 그 넋이 흙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 이규보 '맨드라미'​

외양 때문에 시인 묵객들의 애호를 잘 받지 못하였지만, 우리 여름에 이 꽃이 없었다면 우리의 여름은 정말 자연의 위력에 순종하는 착한 양만이 존재하는 따분한 여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감하고 기개 있는 장군 꽃이 존재하기에 여름철 우리는 더위에 항복하지 않고 이를 이겨내고 가을을 맞는 힘을 얻은 것이리라.​

어떻든 이제 한가위가 되고 고향집에 가서 송편이나 증편을 먹으려다 보니 거기에 장식으로 올라가 있는 이 맨드라미 꽃잎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맨드라미가 우리들 기억에 남는 것은 국민가요가 된 <비 나리는 고모령>이란 노래 덕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표현법으로 '비 나리는'이 어느 틈엔가 '비 내리는'으로 바뀌었다)

호동아(유호 씨의 필명) 작사, 박시춘 작곡, 가수 현인이 불러 1949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으로 시작해 2절의 시작이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다. 고향집 담장 밑에 서있던 맨드라미가 곧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집으로 연결된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오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는 그날 밤을 언제 넘느냐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장명등이 깜빡이는 주막집에서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오늘 밤도 불러본다 어머님의 노래​

‘고모(顧母)’는 말 그대로 어머니를 보살핀다는 뜻이 담겨 있는 지명이다. 이곳 고모는 원래 경북 경산군에 속했으나 행정통폐합 때 대구시 수성구로 편입되었다. 고모 지역 주민들은 고모역에서 통근차나 완행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대구역까지 시내 나들이를 다녀오곤 했다. 특히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집안의 텃밭에서 가꾼 채소와 곡식을 머리에 이고 대구의 번개시장으로 나가서 푼돈을 만들어오곤 했었다.

노래의 작사자 유호 씨는 부산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이곳 고모역에서 잠시 멈추었을 때 멀리 산모퉁이 부근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무명수건을 목에 두르고 먼 길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자꾸만 따라 나왔다. 아들은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빠른 걸음으로 짐짓 앞만 보며 "어무이요! 어서 들어가시이소!"라고 말했을 것이고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따라가며 "어떻게든 네 한 몸 잘 건사해야 한데이, 부디 몸조심 하거래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정황분석도 따라온다.​

다른 이야기로는 일제강점기 징병 가는 젊은이들이 탄 열차가 고모령을 넘어가는데 당시 증기기관차가 높은 경사의 고모령을 한 번에 넘지 못하여 고모령 부근에서 열차가 더디게 운행하였다. 그러자 징병 가는 아들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는 어머니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감옥에 갇힌 독립투사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어머니가 고모령 고개를 넘으면서 아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는 전설에서 ‘뒤돌아보는 어머니의 고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전설처럼 고모령 고개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이 <비 나리는 고모령>이란 노래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이 노래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딱 생각게 하는 노래고 그 노래 한 가운데서 추억의 방아쇠를 당기는 단어가 바로 맨드라미이다. 이런 사연을 가진 이 노래가 1969년에 임권책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또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는 것 아닌가?

그 당시 고향집 담 옆에는 맨드라미가 꼭 있었기에 노랫말 2절 첫머리에 자연스레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맨드라미는 긴 여름엔 잊고 있다가 가을이 되고 한가위가 다가오면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많은 객지의 아들딸들에게 고향을 생각게 하는 노래로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

지금은 고향의 집들도 많이 달라져 담장 밑에 맨드라미가 피는 집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 한가위,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을 찾으면 맨드라미들이 객지를 돌다가 돌아오는 고향의 아들딸들을 환영해 줄 것이다. 그러니 이 가을에 뭐 과일과 곡식이 잘 익어 먹을 것이 많기는 하더라도 올 때 갈 때 울 밑에 서 있는 맨드라미를 외면하지 말고 얼굴을 보며 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어떤가?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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