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에 불리한 종전 논의와 중·일 갈등…자강이 답이다

2025-12-11

4년 가까이 소모전을 끌어온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착점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지난달 19일 미국과 러시아가 28개 항의 종전안(초안)을 협의했다는 언론보도가 국제사회를 크게 흔들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침략으로 영토의 19%를 점령당했고, 민간인과 군인 10여만 명이 사망했다. 우크라이나 국민 1000만 명이 국내외의 난민이 됐다. 여기에 1520억 달러(약 232조4500억원)의 재산 피해를 입었고, 올해 국방비로 국내총생산(GDP)의 31%인 약 600억 달러(약 88조2200억원)를 지출했다. 러시아 위협에 직접 노출된 유럽은 미국의 2.3배에 달하는 2832억 달러(약 401조6300억원)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거래 성사’만 신경 쓰는 미국

중 견제 가치 있는 러에 우호적

미국 편든 일본 곤경엔 모른 척

그간의 동맹 모델 생명 다한 듯

그럼에도 초안은 피해국인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 지역의 전략 요충지를 러시아에 양도하도록 하고, 러시아의 재침략에 대한 안전 보장은 모호하다. 유럽군의 우크라이나 주둔을 배제하고,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불가입과 20만 병력 감축을 요구했다. 또 100일 내 조기 총선 실시라는 내용까지 담고 있어 우크라이나가 양보할 수 있는 선을 훨씬 넘었다.

반면 러시아에는 제재 해제, 전쟁 범죄 사면과 G8(주요 8개국) 재가입 등 국제사회 복귀를 전제로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한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직한 중재자’보다 ‘부동산 중개인’처럼 거래 성사에만 신경을 쓴 셈이다.

이런 지적에 미국은 독소 조항을 완화한 19개 항의 새 협상안을 작성해 협의를 진행 중이지만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미국의 근본적인 입장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

약속 파기한 러시아 편드는 미국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방식과 결과는 우크라이나·유럽 및 국제사회 등 3가지 차원에서 포스트 탈냉전 시대의 국제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자국 일부로 병합하려는 상황에서 주권과 안보를 확보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러시아는 1994년 미국·영국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보존 등을 약속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에 서명했다. 2014년엔 돈바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민스크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를 위반한 러시아의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종전 합의에 실질적 안보 조치를 담는 일은 국가 생존 문제다.

유럽 차원에서는 러시아의 옛 영토 회복주의, 유럽 분열, 회색지대 분쟁 시도를 막고 지역 안보를 확보하는 문제가 걸려 있다. 국제사회 차원에선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용인하는 약육강식을 막고 법의 지배를 지켜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21세기의 체코’에 비유되듯, 강대국 간의 편의적 타협을 통해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병합한 1938년 뮌헨 협정 같은 종전합의를 하면 새로운 불씨를 남길 뿐이다.

이번 협상의 교훈을 새겨보자. 핵심 역할을 한 미국은 자국의 무역·재정적 이익 확보와 러시아를 대중국 견제에 활용하려는 의도에 치우쳐 나토와 유럽 안보의 미래는 고려하지 않았다. 당연히 유럽의 주권과 법치·민주주의 가치는 무시됐다.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위해 동맹 경시와 자유주의 국제질서 교란을 서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친러시아 성향의 소수 측근이 조기 종전만 고려한 결과다.

한편 유럽은 능동적으로 상황을 이끌기보다 미국 제안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지금의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의 분발이 관건이다. 향후 전망은 교섭 결렬에 따른 전쟁 지속과 러시아에 유리한 타결 사이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 내일의 동아시아 될 수도”

우크라이나 종전의 향방은 한반도 주변국에도 깊은 영향을 준다. 최근 중·일 양국의 긴장 고조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우크라이나가 내일의 동아시아가 될지 모른다”는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총리의 언급이 떠오른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지난달 7일 대만 유사시 일본의 참전 가능성을 시사한 발언에 중국 정부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양국은 2010년과 2012년 센카쿠 분쟁 이후 경제·외교·군사 등에 걸친 가장 높은 수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 문제를 빌미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일본을 압박함으로써 다른 역내 국가에 대한 ‘살계경후(殺鷄儆?·닭을 잡아 원숭이를 경계)’의 의미도 있다.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에서 통상 문제만 다룬 채 중·일 갈등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이 미국 편을 드는 과정에서 중국에 보복을 당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은 이를 모른 척 하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다카이치 총리와 통화에서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고 했다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까지 나왔다. 미국이 대중 전략 경쟁의 주 무대인 동아시아에서도 강대국들의 정치 맥락에서 중국에 유화적일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미국 국가안보전략(NSS)도 트럼프 1기에 비해 완화한 맥락에서 대중 관계를 다루고 있다.

북핵 문제에도 우려 낳아

미국 우선주의는 향후 북핵 문제에도 우려를 낳고 있다. 북·미 대화가 재개되면 미국은 북핵에 노출된 한·일의 안보 상황을 고려하기보다 북한의 미국 본토 공격 능력 제거와 북한의 희토류 등 자연자원을 염두에 둔 자국 이익에만 방점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차단할 한·미 동맹 차원의 치밀한 사전 대비와 함께 긴밀한 한·일 협조, 한·미·일 협력 체제의 적극적인 가동이 중요하다.

러시아에 유리한 우크라이나 종전 결과는 북한의 한반도 정세 오판 가능성을 높이고 한·미 동맹을 이간하려는 시도와 군사적 도발 위험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동시에 북·중·러 3각 협력도 촉진할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동맹 배당’(동맹으로서 누리는 안보 이익)은 미국 우선주의로 인해 생명력을 다했을지 모른다. 거래 관점에서 동맹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동맹이 작동하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다. 초불확실 영역에선 기본이 중요하다. 기본은 자강에서 나온다. 경제·군사·기술 면에서 강력한 국력을 갖추고 있어야 동맹도 작동한다. 또한 역내 가치 공유 국가들과 탄탄한 연대를 통해 동맹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

신각수 니어재단 부이사장·전 외교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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