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로 기업·소비자 피해가 극심한 가운데 국내 대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외환시장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기준금리 인하 논란에서 보듯 KDI가 정부를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니 이 같은 행태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31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KDI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KDI는 “우리 외환시장은 자율변동환율제도로 운영되고 있다”며 “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KDI는 “환율 변동은 외생적 충격이라기보다는 미국 경제의 긍정적 측면과 한국 경제의 부정적 측면이 반영되며 나타난 현상”이라며 “이러한 환율 변동은 국가 간 경제 불균형이 해소되는 기제”라고 덧붙였다.
이는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보다도 공격적이다. KIEP는 “대규모 및 장기간 달러 매도 개입은 외환보유액 급감에 따른 대외 신인도 약화 우려 등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면서도 “환율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대외 신인도 관리 강화, 외환 수급 안정, 금융 안전망 강화 등 다각적인 대응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KDI가 정부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 금융 업계 임원은 “국책연구기관이라는 성격 때문에 정부에서 부담스러워할 만한 외환시장 개입 주장을 적극적으로 내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KDI 입장에서는 정부 측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는 국민과 기업을 외면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중소기업은 환율이 1%만 올라도 영업이익률이 0.36%포인트 떨어진다. 중소업체들의 경우 원·달러 환율이 1480원을 오르내리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대기업들조차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고환율은 수입물가와 소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KDI는 비상계엄 사태 이후의 전반적인 경기 진단에 대해서도 몸을 사리고 있다. 실제로 KDI는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 따른 경제 영향에 대해 공식 연구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13일 김 의원에게 제출한 ‘12·3 계엄령 사태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대책’ 자료에서도 “아직까지 구체적인 과제를 수립하거나 계획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국책연구기관으로서 임무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조동철(사진) KDI 원장부터 소극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 원장은 11일 서울 서초구 JW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최근 상황에 대한 질문은 가급적 안 했으면 좋겠다”며 선을 그었다. 당시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한 차례 부결돼 정치 불확실성이 증폭되던 시기였다.
올해 상반기 내수 부진을 이유로 지속적인 금리 인하를 주장하던 것과 달리 추가경정예산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KDI는 5월 “금리 정책의 내수·인플레이션에 대한 파급 시차를 감안해 선제적 통화정책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상황은 이런데 KDI 내부 관리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KDI가 12월 초 공개한 ‘2024년도 자체 감사 결과’에 따르면 KDI 직원 중 대외 활동 신고 의무 위반자는 총 35명으로 조사됐다. KDI 직원이 외부 강의를 비롯한 대외 활동을 하려면 사전 혹은 대외 활동을 마친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원장에게 서면으로 신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