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 심취한 트럼프, 미국 80년간 만든 세계질서 버렸다 [outlook]

2025-03-05

트럼프 미국 행정부 2기 출범 후 경천동지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2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 “당신은 카드가 없다”는 말을 여섯 차례 반복하며 공박했다. 이 말 속에 그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카드’는 군사력·경제력으로 대변되는 힘을 의미한다. 힘이 최강인 미국은 카드가 많고, 그래서 모든 협상에서 이겨야 한다. 그럼에도 “약하거나 어리석은” 과거 대통령들 때문에 미국은 동맹들에 봉이었고, 이제 그동안 뜯긴 것을 되받아내야 한다. 그리고 힘이 강한 대국들, 미국·중국·러시아가 지역별로 세력권을 형성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세계사를 되돌아보면 서구는 그런 강대국의 권력정치에 취해 1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2000만 명이 사망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힘이 아닌 규범을 만들어 지켜나가자며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했다. 그러나 상원이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막았고, 국제연맹은 힘이 빠졌다. 결국 미국의 고립주의로 생긴 국제 리더십의 공백이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초래했다.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이 강했다. 지리적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이 가로막아 외침의 걱정이 없었다. 북의 캐나다, 남의 멕시코는 국력이 약해 위협이 안 됐다. 그러니 유럽이나 아시아 대륙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미국 세력권인 미주 대륙만 챙기면서 살면 됐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무너졌고, 꿈쩍도 하지 않던 미국이 그제야 2차 대전에 참전했다.

2차 대전 종전을 전후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소극적으로 고립주의에 집착하다 2차 대전 같은 재앙을 겪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했다. 그렇게 유엔을 창설하고 국제 규범을 지켜나가자며 국제주의 외교를 펼쳤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영토주권이나 자결권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며 지난 80년간 경찰 역할도 자임했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그 국제 규범을 정면으로 위반한 러시아를 편들고,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한 채 러시아와 협상하고 있다. 전 미국 국가정보국 부국장이었던 베스 새너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는 강대국 정치의 시작이라는 판도라 상자를 연 것이며, 힘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우리에게도 심각한 일이다. 우리 조상들이 구한말에 나라를 잃었던 것은 그런 국제 규범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 북한의 남침 때는 그런 규범이 있었기에 16개국이 군대를 보내 우리를 지켜줬다. 그런데 한국이 세계 13위 경제대국이 될 수 있게 도와준 자유무역이라는 국제 규범도 깨지고 있다.

힘이 지배하는 지금의 상황을 러시아는 환호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가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비극”이라고 말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소련 제국을 부활시킬 수 있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경제제재까지 해제해 주면, 러시아는 크게 약화한 군사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에 수년 후 재침공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때문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사활을 걸고 국제적 안보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무기 지원을 끊고 안보 보장 없는 종전협정과 광물협정 타결을 압박하고 있다.

완충지대인 우크라이나가 무너지고 미국이 유럽에서 빠져나가려는 상황에서 유럽의 지도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강대국 정치관을 비판하며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사실 EU와 영국의 경제력은 러시아의 12배다. 단합만 한다면 유럽만으로 러시아를 억제할 수도 있다.

동아시아의 심각한 우려는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서 미국이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경우의 파급효과다. 군사력을 앞세워 국제 규범을 무시해도 미국이 상관하지 않는다면 시진핑의 대만에 대한 무력 행사 가능성, 김정은의 대남 도발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질 수 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거래할 가능성도 있다. 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국으로부터 버려질 것을 걱정한다. 워싱턴 정가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TSMC의 상당 지분을 미국계 회사에 팔라고 관세 부과로 압박할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 그 때문인지 3월 3일 TSMC는 과거 650억 달러 투자에 더해 1000억 달러 추가 투자를 발표했다. 그러자 대만 방어에 대해 언급을 피해 오던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에 대해 “재앙적인 사건”이라며 다소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도 대화 재개를 제안할 것이다. 대화가 시작되면 부분적 비핵화와 부분적 제재 해제를 교환하는 2018~2019년 협상 틀의 맥락에서 핵 동결과 ICBM 제거를 경제제재 해제와 교환하는 스몰딜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한국은 북핵뿐 아니라 단거리 미사일 등 재래식 전력의 위협에 계속 노출되게 된다. 이보다 더 큰 스케일의 빅딜을 추진하는 경우 지금 러시아와 하는 것처럼 일거에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선언하고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 철수를 시도할 수 있다. 한반도는 엄청난 격랑에 휘말릴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한국이 소외되지 않고, 안보와 국익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단기 전략 몇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 첫째, 트럼프 대통령의 집중적인 관심사는 동맹국 한국의 안보가 아니라 미국의 경제적 이익이다. 따라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대미 무역흑자 감소 방안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선제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압박 전략과 패권 경쟁은 지속될 것이다. 그런 미국의 대중전략 수행에 한국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는지 부각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시바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한·미·일 협력을 중시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셋째, 우리의 선두 산업 분야에서 미국과 긴밀한 협력을 구축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심을 표명한 조선뿐 아니라 원자력·방산·반도체 등 분야에서 미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의 필수적인 고리를 우리 업계가 점유한다면, 그것을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하는 데 중요한 외교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중장기 전략으로는 첫째, 군사적 자강이다. 아직 한·미 동맹은 중요하지만, 우리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기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때에 대비해 잠재적 핵 능력을 포함한 국방력을 강화하고 대북 억제를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 미국 국방차관은 주한 미군은 대중국 억제에, 한국군은 대북 억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한국은 그동안 너무 미·중 대국 외교의 틀에 갇혀 있었다. 물론 북한 문제를 고려할 때 이 둘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를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국력에 맞춰 외교적 시야와 공간을 크게 확장해야 한다. 무엇보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곧 세계 3위 경제 대국이 될 민주국가 인도와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셋째, 다자기구들이 힘을 잃고 있는 시점에서 일본·유럽·캐나다·호주 등 뜻이 맞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소다자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강대국 정치의 험난한 파도를 함께 헤쳐가면서 국제적 규범을 유지해 나갈 파트너들을 많이 만들고 우리 외교의 체급도 늘려 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국내 정치적 단합이다. 힘이 곧 정의인 세상에서 북의 위협은 강화되고 한·미 동맹의 불확실성은 증대하는데, 우리는 지금 극도로 분열돼 있다. 이러한 분열은 강대국 세력 정치가 국내 정치로 유입돼 나라를 파멸로 끌고 갈 틈새를 만들어준다. 그런 경험은 구한말 한 번으로 족하다. 그때와 달리 지금 우리는 나름의 카드도 있다. 이 카드를 제대로 쓰려면 단합해야 한다. 그렇기에 분열과 대립을 촉발하는 고장 난 정치 제도, 즉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이번 기회에 꼭 개혁해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장관=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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