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이 결실을 맺었다. 2017년 대선 경선, 2022년 대선 본선에서 패했던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이 삼수 끝에 대통령실에 입성한다. 가난한 소년공에서 인권변호사를 거쳐 성남시장·경기지사·야당 대표로 이어지는 그의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릴 적 참혹했던 경험은 때때로 그를 주저앉혔지만, 오랜 비주류의 삶은 인생의 자양분이자 정치적 자산이 되어 지금의 그를 빚어냈다.
#소년공 이재명
“나는 겁이 없다. 살아가면서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날 때부터 강심장이어서가 아니라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왔기 때문이다.”(『함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재명은 1963년 10월 23일(음력)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에서 태어났다. 산골 화전농이던 부모 슬하 5남2녀 중 다섯째였다. 20리(약 7.9㎞) 산길을 걸어 국민학교를 다녔다. 가난의 배고픔은 등하굣길 “산과 들에서 먹어서 죽지 않는 것은 모두” 먹으며, 가난의 설움은 학교 도서실에서 『암굴왕』 『해저 2만리』 같은 이야기책을 읽으며 해소했다.

아버지는 이재명이 국민학교 3학년 때 집을 떠났다. 아버지가 남긴 노름빚과 남은 가족의 생계는 온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이재명은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준비물을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 그 대가로 선생님에게 흠씬 두들겨 맞거나 화장실에서 똥을 푸는 벌을 받았다.
이재명은 삼계국민학교 졸업 직후인 76년 2월 고향을 떠났다. 집 떠난 아버지가 잡역부로 일하며 정착한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으로 이주하면서다. 온 가족이 생계전선에 내몰리면서 학업은 중단됐다. 대신 소년공의 삶이 시작됐다. 손톱 밑에 박힌 검은 고무가루, 몸 이곳저곳에 남은 베인 흉터, 손목이 프레스 기계에 눌리는 바람에 굽은 왼팔은 그 시절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흔적이다. 장애를 입었다는 좌절감에 두 차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이재명은 78년 중졸 검정고시와 80년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대학 본고사를 폐지한 81년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입 시험을 준비했다. 오전 7시에 일어나 다음날 오전 4시에 귀가하는 일정을 소화한 끝에 중앙대 법대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변호사·시민운동가 이재명
“사람이 되어야지 명사나 권력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1987년 4월 28일 일기)
이재명은 대학 동기들이 아스팔트로 나갈 때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재수 끝에 8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해 위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사시 합격 소식을 듣곤 울었다. 이재명은 저서 『함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 앞에서 눈물 흘리던 그 얼굴이 나에게는 용기의 원천이 됐다”고 회고했다.
87년 3월 입소한 사법연수원(18기)에서는 학생운동권 출신 연수생들이 조직한 ‘노동법학회’에 참여하며 사회과학 서적을 뒤늦게 접했다. 가두시위에 나섰고 무료법률상담 활동도 했다. 노태우 정부가 정기승 대법관을 대법원장에 임명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성명서 작성·발표도 주도했다.

88년 5월 19일 일기장에 “나는 성남을 새로이 일으킬 것이며, 민주화의 기점으로 성장시킬 것이고, 성남 지역의 사랑받는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쓴 이재명은 이듬해 성남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 무렵 물밀듯 하던 노동 관련 시국사건은 그가 도맡다시피 했다. 시위할 땐 시위대의 일원이었고, 시위가 끝나면 체포된 이들의 노상(路上) 변호사였다.
이재명은 매주 금요일 성남의 재야 인사들과 어울리며 지역 현안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후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를 앞둔 95년 3월 성남시민모임(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을 창립했다. 그의 별명은 ‘싸움닭’이었다. 첫 작품은 96년 성남시 대장동 수도권 남부 저유소 건설 저지 운동이었다. 성남시로부터 3개월의 숙의를 거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후 5일 만에 건축 허가가 나면서 뒤통수를 맞는 실패를 겪었다.
99년엔 성남시가 기존 업무·상업지역이던 백궁·정자지구를 주거지역으로 용도변경한다는 제보를 받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공동대책위를 꾸렸다. 2002년 5월 국정원 간부의 폭로로 백궁·정자지구 아파트(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의혹이 제기되자 그는 이 문제를 파고드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취재하는 방송사 PD와 검사 사칭을 공모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정치인 이재명
“2004년 3월 28일 오후 5시 성남시청 앞 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서 눈물 훔치며 결심했습니다. 시장 출마를, 정치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4월 27일 대선후보 수락 연설)
이재명은 2003년 성남 구도심 소재 종합병원 2곳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공공의료시설인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벌였다. 지방자치법상 주민발안제도를 연구해 성남시민 1만8595명의 서명과 손도장을 받은 시립병원 설립 조례안을 성안했다. 하지만 성남시의회는 2004년 3월 이 조례안에 대해 무기한 심의 보류를 결정했고, 당시 방청석에 있던 이재명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재명은 훗날 “함께 방청하던 시민들이 눈물로 날치기 무효를 절규하며 도망간 시의원과 시의장을 쫓아다니는 걸 보며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2006년 2월 2일 블로그)고 썼다.

시의회 ‘난동’의 주범으로 몰린 이재명은 경찰 수배망을 피해 시청 옆 주민교회 지하 기도실로 몸을 숨겼다. 이때 시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정치를 결심했다. 그는 2005년 8월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지만, 2006년 지방선거(성남시장)와 2008년 총선(성남 분당갑)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성남시장이 된 건 5년이 더 흐른 뒤였다.
이재명은 2010년 성남시장 취임 직후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선언하고 재정 지출 구조조정에 팔을 걷어붙였다. 이후 포퓰리즘(인기영합)이란 비판에도 3대 무상 복지정책인 무상교복·무상급식·공공산후조리원 정책을 밀어붙였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 지방재정 개편을 추진하며 무상 정책에 제동을 걸자, 이재명은 그해 6월 광화문광장에서 11일간 단식 농성을 벌였다.

#대선후보 이재명
“상처는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었고, 갈등은 혁신 과정의 불가피한 진통이었다.”(『결국 국민이 합니다』)
이재명은 2017년 처음으로 대선에 도전했지만, 경선 3등에 그쳤다. 2018년 지방선거에 도전해 경기지사에 당선됐다. 계곡 정비 사업, 남한산성 불법 노점 정비 사업 등을 추진해 도민의 박수를 받았고, 코로나19 대유행 당시엔 신천지 본부를 찾아가 현장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이재명은 2021년 두 번째 대선에 도전한다. 당내 경선은 무난히 통과했지만, 2022년 3월 본선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에 0.73%포인트 차로 석패했다. 그는 ‘대선 패배 후 백의종군’이란 기존 문법을 깨고 3개월 만에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도전해 곧장 국회에 입성했다. 2022년 8월, 지난해 8월 두 차례의 전당대회에서 연이어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역대 가장 강력한 야권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2018년 지방선거, 2021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사법 의혹은 줄곧 이재명의 발목을 잡았다. 특히 2023년 9월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며 기사회생한 그는 지난해 1월 부산 방문 도중 흉기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지난해 4월 총선 공천은 당 안팎에서 ‘비명횡사·친명횡재’란 비판을 받았지만 선거에서 압승(175석)을 거두며 논란을 불식시켰다. 그는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서 “당사자들로서는 힘든 일이었겠지만, 중진을 포함한 많은 분들이 2선으로 후퇴했고, 국민과 당원이 적극 참여한 혁신공천으로 사상 최대 폭의 세대교체, 인물교체를 끌어냈다”고 자평했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탄핵 정국에서 이재명은 명실공히 차기 대선 주자 1위로 우뚝 섰다. ‘회복과 성장’을 기치로 내건 그는 자신이 정치와 경제의 위기를 극복할 적임자라며 이렇게 외쳤다. “지금은 이재명.”
하준호([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