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가 만만하냐 : KBS 제작진이 본 부역 현장

2025-03-03

갑작스러운 '더 라이브' 폐지 결정에는, 용산의 입김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충성 경쟁의 일환으로 시작된 조처였다. 프로그램은 날아가도, 사람은 남는다. 사측에 소속된 피디들은 다른 부문으로 발령받았다. 그럼, 프리랜서 작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라이브 사태 당시 제작진으로 있었던 한 방송작가의 이야기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극한 작가의 세계. 지금부터 시작한다.

낙하산 내려오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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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수장으로 파우치 박(aka. 박장범)이 오르기 전, 또 하나의 박이 있었다. 이름하여 낙하산 박(aka. 박민). 그는 취임 전날 내정자 신분으로 업무 지시를 내렸다. 첫 지시는 데일리 시사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금 바로 즉시! 그에겐 취임 당일부터 용왕님께 선물을 올려야 한다는 야심 찬 포부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2023년 11월 13일. 출근 준비 중이던 나는 난데없는 결방(이라고 쓰이고 폐지라고 읽히는) 통보를 받았다. 숙청에 나선 시사 프로그램 작가였기 때문이다.

결방? 야구도 끝났고 재난도 아닌데 무슨 결방?

아무리 용산발 낙하산이라고 한들 KBS는 공영방송이고, 국민의 소중한 수신료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다. 심지어 더라이브는 정규편성 프로그램이었다. 당장 반나절 후 방송을 사장이 '폐지시켜!'하면 번갯불 콩 볶듯 태워버리는 게 국민의 방송이라고?

사측에서 내놓은 결방 사유는 더 황당했다. 눈곱만큼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방 공지

신규 프로그램 붐업 차원 특별편성으로 일주일간 편성에서 삭제한다.

아이템 선정부터 주제 기획, 출연자 섭외 모두 마친 상태였다. 방송을 삭제할 만한 특별편성이라면 대~단히 스페셜해야 했다.

포털사이트로 편성표를 확인해 본다. 밤 11시, 어디 보자… 주말 사극 재방송이 배정되어 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 그다음 날은 개그 프로그램 재방송이었다. 기가 찼다. 결방 공지는 어떻게 하라고 이리 무식하게 편성을 짰을까. 어느 방송사가 정규편성을 당일 삭제하고 재방송을 틀겠는가?

천재지변이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스포츠 편성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프로그램은 안정적으로 편성되어야 한다. 올림픽 같은 국제 이벤트로 결방할 경우에도 3~4주 전에는 제작진과의 협의가 필요하다. 결방이든 폐지든 무조건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방송 규약으로 정해둔 ‘제작진과의 협의’ 절차가 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이 과정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프로그램 방향성이나 개선에 대한 내부 논의, 소통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편성을 삭제한 건, 방송 역사상 전례 없이 방송법과 규약을 무시한 처사였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갤럽조사 자축 판넬

그 아래는 제작진 성명문

차라리 성과가 좋지 않아 폐지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겠다. 공영방송 1채널과 달리 2채널은 광고로 운영이 된다. 광고가 들어오지 않거나 시청률이나 화제성이 낮아서 없애겠다고 하면 슬프겠지만 억울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 우리 팀은 축제 분위기였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갤럽조사)’ 4위에 오르며 시사 방송으로서는 이례적인, 해당 방송사 성적으로만 따지면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광고는 연일 완판. 개별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쑥쑥 늘어나 있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을 위한 방송을 만드는 우리는 잘나가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총선이 5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사흘 후 폐지 공지

특별편성 공지 사흘 뒤 또다시 일방 통보를 받았다. 이번에는 ‘4주간 대체 편성 후 폐지한다’는 공지였다. 예상된 수순이라 이때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얼마나 그럴듯한 이유를 댈지 궁금했다.

마시고 있던 물을 뿜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원래 이 방송은 1채널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밤 11시대에 죽어가는 2채널을 살려놓으라’는 석연치 않은 명분으로 유배당한 지 5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게다가 강제 이사를 당했음에도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사측 요구대로 2채널을 살려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사흘간 짱구를 굴린 결과가 겨우 이거라니. 성의가 없었다.

당시 나는 방송작가 1N년 차였다. 그간 참 별 더러운 꼴들 많이도 봤지만, 하다 하다 자사 인기 방송을 폐지로 협박하는 꼴까지 보니 ‘내 언젠가는 꼭 때려 치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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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로 폐지하지 않고 4주 대체 편성일까? 비정규직 계약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정규직은 PD 정도 일뿐, 프리랜서 근무자가 훨씬 많은 팀이었다. ‘갑’에 해당하는 방송사는 프로그램 폐지 4주 전에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4주간의 페이도 지급해야 한다. ‘을’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기간에 업무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낙하산 박은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계약대로 돈은 쥐어 줄 테니,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 방송만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언론에선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들이 4주 치 페이를 모두 보전받은 것처럼 보도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대부분 작가들은 3주 치 페이만 받았다. 방송계의 악행 중 하나인 ‘쪼개기 계약’ 때문이다.

사태 발발 6개월 전으로 돌아가 보자. 작가들은 행정업무 편리성이란 명목하에 계약일을 통일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그래선 안 됐지만 작가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을’은 나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우리는 방송에 투입된 날이 달라도 해당 일로부터 6개월 계약을 맺었다. 왜 하필 6개월이냐? 문체부에서는 1년 계약을 권고하지만, 방송사에서 ‘권고’는 무시한다고 보면 된다. 6개월만 있으랴. 1개월, 2개월 계약도 숱하게 존재한다(이후 재계약으로 일을 연장하거나 나가는 식이다).

하필이면 방송 폐지 시점보다 작가들 계약 종료 시점이 1주 빨랐던 터라, 대체 편성 페이는 4주 치가 아니라 3주 치만 보전되었다. 나 또한 3주 치의 페이를 받고 실직자가 되었다. 사회 초년생이 많은 FD팀, 분장팀, 유튜브 담당팀 등… 정규직 PD를 제외한 수십 명이 202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비정규직 근로자들 성명문

끝내 열지 못한 777회

<더라이브> 마지막 화(7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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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폐지는 777회를 앞두고 이뤄졌다. 행운의 럭키세븐이 세 개나 있는데, 이런 게 운명의 장난인가? 하필이면 776회에 끝이 났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 불운이 닥치다 보니 새해를 맞이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일출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집안에 갇힌 날이 길어졌다. 제작할수록 애정이 쌓였던 프로그램이라 여운이 오래갔다. 유튜브 커뮤니티에 달린 시청자 댓글을 밤새워 읽기도 있다. 제작진만큼이나 진심이던 애청자들의 마음에 위로받으면서 (일개 프리랜서지만) 방송을 지켜내지 못함에 대한 부채감이 들기도 했다. 일부 제작진 사이에서 유튜브 라이브라도 켜서 ‘777회’를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 밤 11시에 진행되는 60분 생방송.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제작진들은 아침에 출근한 뒤 자정을 넘겨 퇴근했다. 6학년이 시청해도 재미있는, 쉽고 친절한 시사 프로그램이 콘셉트라 9시 뉴스처럼 딱딱하게 만들 수 없었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려운 걸 쉽게 만드는 건 꽤 어렵다. 또 쉽기만 하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쉬우면서 동시에 깊이도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중요한 알맹이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처럼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A pain! A pain! Such a pain!

출처 -

매 방송이 만족스러울 순 없다. 하지만 그 이유가 노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소위 ‘방송국 놈들’이라는 욕을 먹지 않을 만큼, 시청자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일했다. 그 속에는 장르 특성상 명맥을 잇기 어려운 시사 프로그램을 지키고 싶은 순정이 있었다. 언제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휘둘릴 텐가. 눈엣가시인 방송이라고 해도 유튜브 구독자 100만 명을 달성하면 못 건들지 않을까? 당시 구독 증가 추세를 봐선 실현 가능한 수였지만 문제는 그전에 쫓겨났다는 점이다. 낙하산이 뜨자마자 폐지되었다. 5년을 함께한 시청자들과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한 건 제작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그만큼 극악무도했다.

KBS에 올라온 프로그램 폐지 반대 청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이 남은 건 장외투쟁을 해준 시청자들이 덕분이다. 그 무렵 매일같이 폐지 반대 청원을 올렸고 방송사가 답변 조건으로 내건 동의자 수를 달성시켰다. 지푸라기라도 함께 잡아주려는 그 마음이 감사했다. 어쩌면 제작진보다도 프로그램을 아끼고 사랑해 준 분들이었다. 유튜브 커뮤니티로 대신한 마지막 작별 인사에는 수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시사 프로그램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르 특성상 압력을 받거나 법적 분쟁에 휘말리더라도,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할 만큼 관심이나 수익성은 나지 않아 실망스러워도, 저널리즘이야말로 언론의 숙명이다. 수신료 받는 공영방송의 목적은 공익 수행이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2025년 5월, 장미 선거가 올까요?

작년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차갑게 시리던 계엄의 시간을 지나 이제 봄이 왔다. 계절의 여왕, 5월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되돌려야 한다. 어용 방송을 공영 방송으로, 극우주의를 민주주의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올 여름에는 한시름 놓고 휴가를 다녀올 수 있도록.

한국인의 DNA에는 위기 극복에 특출난 감각이 새겨져 있다. 국난을 헤쳐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비롯해 IMF 외환위기, 코로나 팬데믹 등… 평소에는 시샘이 많아 서로 잘난 꼴을 못 보다가도, 위기에 닥치면 재빨리 뭉치는 국민성 덕분에 우리는 신속히 회복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우리는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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