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1950년생)
경남 하동 출신으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를 통하여 등단
.
<함께 읽기> 이 시는 나란 '화자'가 너란 '청자'에게 건네는 대화 형태로 돼 있는데, 나는 '슬픔'과 너는 '기쁨'과 연결된다. 아시다시피 슬픔과 기쁨은 대조가 되는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당연하지 않은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보통 '기쁨이 긍정적'으로 쓰이고 '슬픔이 부정적'으로 쓰이는데 여기서 시인은 우리의 의표를 찌른다.
슬픔과 기쁨을 서로 뒤바꿔 놓음으로써. 기쁨은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존재다. 또 기쁨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지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슬픔은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 추워 떠는 사람들의” 아픔까지 덮어주며,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걸으며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는 존재다. 즉 기쁨이 굉장히 '이기적'인 존재라면 슬픔은 '이타적'이다. 기쁨이 '무관심'이라면 슬픔은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뜻한다.
그렇다면 '슬픔의 평등한 얼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는 모든 사회 약자들을 다 같이 평등한 존재로 본다는 뜻이라 하겠다.
말로야 강자 약자 없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는데 정말 평등 한지에 대해선 의문스러울 때가 한두 번 아니다. 강자가 느끼는 평등과 약자가 인식하는 평등은 다르기 때문에 강자의 입장에서 기쁨만 챙긴다면 당연히 평등이 아니다. 그리고 청자인 '너'는 일부의 이기적인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소외돼 살고있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관심한 사람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달리 말하면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내뱉는 이도 거기에 들어간다. 시인은 우리에게 가난과 소외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으니,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보여 달라는 마음에서 이 시를 썼을 거라 생각든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大記者
sgw3131@jeonmae.co.kr
저작권자 © 전국매일신문 - 전국의 생생한 뉴스를 ‘한눈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