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별빛을 섞을 때

2025-11-10

늦은 밤 운전을 할 때면 불 꺼진 휴게소나 졸음쉼터에서 잠시 쉰다. 의자를 젖혀 창을 열면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 남쪽 지방은 아직 별이 촘촘하다.

혼자 별자리를 찾다 보면 유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 어린 시절은 잦은 이사로 한 곳에서 오래 거주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기도 한다. 잠시 살았던 그곳은 바닷가였다. 바닷바람은 비리고 역해서 나는 가끔 먹은 것도 없이 게워 냈다. 부모가 일을 나가면 아이들은 공터에서 놀았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하던 낯선 꼬마를 아이들은 궁금해했다. 나는 곧 떠날 것을 알았지만 그들과 함께이고 싶었다. 얼굴에 땟국물이 흐르던 한 아이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의 집은 군대 막사처럼 반원으로 생긴 녹슨 함석집이었다. 아니, 사각이었던가? 낡은 양철 문을 열자, 어둠이 밀려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기도 없는 집이었는데 가운데 통로를 두고 방들이 다닥다닥 마주 보고 있었다. 전기세가 미납되면 단전은 흔한 일이었지만 그 집은 불법건축물이어서 처음부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모두 일을 나갔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가난한 삶에 별빛 한 줌 비추면

별과의 거리만큼 괴로움 줄어

요즘 청년에게도 별빛 비쳤으면

그날 내가 기억하는 것은 무수한 별이었다. 그 집은 낮에도 별이 보이는 집이었다. 함석 천장에 송송 난 구멍을 나는 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오빠들의 책으로 별자리를 알았다. 북두칠성·카시오페이아·오리온자리·전갈자리, 여름밤이면 형제들은 동네 평상에 앉아 외계인의 존재로 말씨름을 하곤 했다.

그 아이가 없는 집에 나는 혼자 낮에 뜬 별을 보러 갔다. 비가 오면 별에서 물이 쏟아져 통로 바닥이 질척거렸다. 녹슨 함석집은 별도 가난했다. 그때의 기억은 오래 남아서 나는 학창 시절 자취방 천장에 야광별 스티커를 붙였는데 해가 들지 않는 나의 가난한 반지하방에도 별이 빛났다. 별은 나의 여기였고 저기였으며 동시에 나의 현실이자 미래였다.

그 기억을 다시 만난 건 몇 년 전 광주에서였다. 인도의 미술가 실라 고다(Sheela Gowda)의 작품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녹슨 드럼통을 재활용한 작품이었는데 그 속에 들어가면 수많은 별이 보였다. 그때 나는 뒤늦게 내 속에 있었던 ‘가난한 별’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 별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의 기억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에게 별은 현실이었다.

어릴 적 나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누가 갖고 싶은 걸 물으면 망원경이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천체 망원경이었지만 가져보기는커녕 구경도 힘들었다. 미국의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수많은 천문 기구의 작동법을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거나 자신만의 천체 망원경으로 혜성을 발견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 부러웠다. 그녀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은 소녀가 훗날 우주 암흑물질의 존재를 최초로 입증한 베라 루빈이었다. 나는 천문학자가 될 수 없었지만, 대신 마리아 미첼의 연설을 좋아했다. “삶에 별빛을 섞으세요. 그러면 하찮은 일에 마음이 괴롭지 않을 겁니다.” 내가 나의 현실에 심리적 쾌적 거리를 둔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지구와 별의 거리만큼 나의 환경과 일찍 거리를 두었다. 집안이 가난한 거지 내가 가난한 것이 아니었고, 나의 미래는 여기가 아닌 저기였다. 함석지붕의 별처럼 수많은 갈망이 내 속에 있었다. 그 시절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절망이나 좌절감이 없었다. 노오력하면 되는 시대였고 그동안 대한민국은 무섭게 발전했다.

얼마 전 농사를 짓는 오랜 지인의 아들이 수도권에 방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의 직장 근처에 집을 얻으려다 여의치 않았다고 가끔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지인은 20여 년 전 서울집을 정리하고 귀농했는데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꼬마였던 아들은 수줍은 청년이 되어있었다. 작은 창이 옆 건물 벽에 가려진 반지하방은 낮에도 어둑해서 책을 읽으려면 불을 켜야 했다. 나는 가져간 화장지를 밀어놓고 농담을 했다.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는 방이구나.”

청년은 무슨 말인지 몰라 멋쩍게 웃었다. 나는 내 유년의 함석집과 실라의 드럼통 안에 뜬 별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침묵했다. 내 청춘의 별은 희망이라는 성실의 사다리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 청년들에게서 사다리를 치운 사람들은 우리 어른들이었다. 나는 그 방 천장에 별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먼저 절망감이 엄습했다. 돌아오는 길 도시의 아파트 불빛들은 별보다 더 휘황했다. 저 불빛 하나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을 생각한다. “삶에 별빛을 섞는 것”이 아니라 불빛을 섞어야 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미안하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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