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공존의 헬레니즘 도시, 시르캅

2025-11-09

기원전 326년 현 파키스탄의 탁실라 지역까지 원정 온 정복왕 알렉산더는 원주민의 저항과 무더운 기후에 지쳐 바빌론으로 회군했다. 원정대를 따라왔던 헬라인들이 이곳에 정착했고 기원전 180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데메트리우스왕은 그 중심도시로 시르캅을 건설했다. 기원후 3세기 쿠샨왕조의 정복으로 종말을 맞을 때까지 국제적인 번영을 구가했다.

1930년대 조사로 도시의 일부 윤곽이 드러났으나 전체 면적의 5분의 1 정도만 발굴에 그쳤다. 총길이 4.8㎞의 두툼한 성곽을 두른 요새 도시로 내부는 직각 체계의 도로망을 규칙적으로 계획한 ‘히포다미아식’ 격자 도시였다. 에게해 도시 밀레투스에서 개발된 그리스식 도시계획이 인도 땅에 실현된 것이다. 발굴 지역은 남북 1.2㎞, 동서 400m 면적으로 도시의 중심 가로변이다.

곧게 뻗은 중심로 양편에 상점들이 연이었고 사이사이에 각종 사원이 자리했고 끝부분의 대형 건물지는 왕궁으로 추정했다. 크고 작은 불교 사리탑, 스투파들이 여럿 설치되었고, 성문 앞의 이오니아식 건물은 조로아스터교 사원으로 추측한다. 파르테논만큼 큰 신전도 있었고, 정체 모를 ‘쌍두 독수리 사원’과 자이나교 사원 유적도 남았다. 거대한 해시계 유적은 태양 숭배의 미트라교와 관련이 제기된다. 그리스의 신교(神敎)와 로마의 미트라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불교와 자이나교 등 당시의 모든 종교가 중심 도로변에 나란히 공존했던, 진정한 코스모폴리스였다.

건축물의 기단들은 그리스식이며 스투파 등 상부구조는 인도식이다. 그리스식 가구와 인도식 상아조각, 그리스식 동전과 인도식 장신구 등 온갖 문물도 출토되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가 병용된 접시도 발견했다. 이곳을 방문한 그리스 철학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는 “이 도시는 니네베만큼 크다”고 그 국제성과 규모를 찬탄했다. 시르캅의 거대한 폐허는 동서문화를 아울렀던 헬레니즘이 남겨준 유산이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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