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계엄령과 탄핵으로 필자의 슬픔이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지난 29일 갑작스러운 여객기 사고 소식으로 깊은 아픔이 밀려왔다. 필자는 아프고 애석한 마음까지 겹겹이 쌓이며 숨이 막힐 듯했다. 그래서 필자는 연말을 의미와 값어치가 있는 공연으로 마음을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지난 12월 30일 저녁 7시 30분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의 ‘무명씨의 아홉 짐’의 공연이 눈에 띄었다.
‘무명씨의 아홉 짐’은 전통적인 지게꾼들의 노동요를 바탕으로 창작된 마당극이다. 여기에서 ‘아홉 짐’은 세시풍속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무를 아홉 짐하고, 새끼를 아홉 발로 묶으면 부자가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공연은 2018년부터 서울문화재단 예술 창작 활동 지원사업에 뽑힌 <가락프로젝트> 연속물 가운데 하나다. 급속한 산업화로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면서 마을의 민속 문화가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시작되었다.
이창훈 감독은 “민속 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사라져가고 있는 민속 문화를 만나기 위해 가락프로젝트의 길을 계속 가겠다.”라고 말했다.
무대는 양쪽에 계단을 놓았고 악단이 무대 뒤편 가운데에 자리 잡는다. 벽에 비치는 영상은 아름다운 한국의 산 풍경으로 채워진다. 3명의 소리꾼이 나와 지게를 이용해 놀이하며 재담과 소리를 하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국악 공연이니 극 내용이 뻔하지 않을까 지레짐작하였는데 소리꾼들의 재치 있는 재담에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또, 옛날 지게꾼 무명씨들의 생활사를 마치 지금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듯 표현하여 그들의 이야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소리꾼들이 놀이로 극을 이어가다 보니 대본대로 흘러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계획대로 놀이의 결과값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노련하게 서로 맞장구치고, 자연스럽게 관객도 극의 일부인 듯 담아낸 것이 영락없는 마당극이다. 전통의 극 안에서 우리의 사라져가는 민속 문화를 현대의 감성과 언어로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마당극이나 창극, 혹은 오페라나 뮤지컬 등 극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은 대부분 대규모의 관현악단이 연주한다. 그만큼 표현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공연은 단 4명으로만 연주단을 구성하였다. 과연 저 4명으로 얼마큼의 극음악 표현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4명의 연주단은 필자의 걱정을 금세 무색하게 만들었다. 거문고, 피리, 대금, 타악을 주 악기로 삼아 생황과 단소 등 여러 악기를 활용하였다. 장면과 노래가 바뀔 때마다 다양한 음색으로 분위기를 바꾸며 극의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었다. 또, 종횡무진 여러 효과음을 낸 타악 연주가 일품이었다.
대부분 선율악기에 거문고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 해금과 가야금이 노랫가락에 맞춰 수성가락으로 연주하는데 이번 공연은 거문고가 그 역할을 하였다.
거문고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문고가 연주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마치 거문고는 낮은 음역을 깔아주는 반주 역할 정도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여러 공연에서 종종 제외된다. 그러나 이 공연의 제작, 극작, 음악 총괄을 맡은 이창훈 감독은 과감하게 거문고를 사용하였다.
지게꾼 역할을 한 세 남성 소리꾼의 음색이 거문고와 잘 어울리는 것은 당연했고, 소리꾼들과 거문고의 소리가 극장을 풍성하게 메우며 공연의 품위를 높였다. 거문고의 주선율을 연주하는 유현과 대현이 양과 음의 대비되는 소리로 독특한 음색을 내었다. 더불어 반주하듯 개방현과 주선율이 동시에 울려 퍼지면서 여러 대의 악기가 연주하는 효과를 내었다.
오랜만에 악기의 특성을 잘 알고 악기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어 사용한 공연을 보면서 공연의 품위가 느껴졌던 것은 그들의 전문성 때문일 것이다. 역시 누구 손에 어떤 것이 쥐어지는지에 따라 그 의미와 값어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또한, 사라져가는 민속 문화의 소중한 값어치를 알고 그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은 칭찬할만했다. 그뿐만 아니라 단 4명의 연주자가 전곡을 창작하여 선보였는데 음을 표현하는 것이 손색이 없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볼거리가 많아진 요즘 마당극 공연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 그래서 대형 극장들은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극의 내용으로 공연을 올린다.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극에 소요되는 예산에 견줘, 대중성이 많지 않다고 판단하여 잘 아는 내용과 음악으로만 대형 공연 중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연은 의미와 값어치에 주목하고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창작하며, 소규모의 국악기만으로도 높은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전통 음악극의 가능성을 보였다. <가락프로젝트>의 의미 있는 창작에 박수를 보내며 그들의 값어치 있는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이 공연은 제작ㆍ극작ㆍ음악ㆍ총괄 이창훈 감독 외 연주자 김진욱ㆍ박계전ㆍ이아람이 함께하고 소리꾼 정보권ㆍ이재현ㆍ한진수가 출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