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많은 사람들의 생각으로 EBS는 즉 한국교육방송공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교양 프로그램 전문채널이다. 그리고 ENA는 예능과 드라마, 즉 오락 프로그램 전문채널이다. 이 두 채널의 연출자들이 협업한다고 했을 때, 당연히 궁금증은 커질 수밖에 없다.
EBS와 ENA에서 예능 프로그램 ‘추성훈의 밥값은 해야지’(이하 밥값)를 론칭했다. 두 채널이 똑같이 투자해 두 명의 연출자를 메인 PD로 투입해 만든다. 이 실험은 방송가에 큰 흥미로움을 자아냈다. 과연 촬영은 누가 주도할까. 의미와 재미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조율할까.

그런데 실제 촬영현장에서 EBS의 PD들이 재미를 추구하고, 오히려 ENA PD들이 의미와 정보를 추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겼다. 이들의 유례없는 협업은 오히려 미래 방송 콘텐츠에 대한 의미 있는 실마리를 던지는 작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밥값’의 주인공 EBS 송준섭PD와 ENA 안제민PD다.
“제가 한참 후배라 먼저 말씀드리지만,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기존의 예능 연출을 하시는 분들의 생각을 배웠어요. 제가 EBS에서는 펭수도 연출을 했지만, 예능의 적통을 따른 건 아니었거든요. 혼자서 수학공부를 하다가 마치 ‘수학의 정석’ 책을 발견한 느낌이었죠.”(송준섭PD·이하 송)

“ENA가 공동제작을 여러 군데 하고 있지만, 이번이 가장 의미 있는 작업이지 않았나 해요. 정체성이 같은 채널이 가면 나누기밖에 되지 않지만, 서로가 갖지 못한 부분을 추구하는 데서 묘한 부딪침이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저희가 오히려 정보나 교양으로 가고 싶고, EBS 제작진은 예능적으로 가고 싶어하는 거죠.”(안제민PD·이하 안)
두 채널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자이언트 펭TV’ 등을 연출하면서 대한민국에 ‘펭수 열풍’을 일으켰던 송PD가 여행 유튜버 곽튜브(곽준빈)와 함께 2023년 ‘곽준빈의 세계기사식당’을 처음 기획했다. 첫 시즌 EBS의 힘만으로 끌고 갔던 시리즈는 2편부터 ENA가 참여했다. 이 인연으로 송PD는 다시 ENA와 만났고, 그 과정에서 tvN 등을 거치며 ‘짠내투어’ 등을 연출했던 안PD와 만났다.

“예능과 교양이 부딪치는 흥미로운 부분은 있습니다. 일단 현장에서 ‘대장’은 한 명이어야 하기에 송PD님께 맡기고 있고요. 저는 가편집을 하면서 수정사항을 말씀드리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자막이 정보가 필요할 거 같은 부분에 제작진의 생각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재미있지 않다면 개인 감상은 안 넣어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자제시켜드리기도 해요.”(안)
“프로그램이 세계를 다니면서 추성훈, 곽튜브, 이은지 세 분이 밥값을 벌고, 그 돈으로 맛있는 걸 즐기는 내용인데 직업을 선택하는 부분도 신경이 쓰여요. 또 그 지역 특유의 직업을 역사적으로 잘 설명하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느낌이 달라지거든요. 너무 많으면 다큐멘터리 같고, 없으면 다른 여행 프로그램과 다를 게 없어서 그 적절한 지점을 찾는 데 고민하고 있습니다.”(송)

첫 시즌을 11회 분량으로 만든 제작진은 중국을 처음 기착지로 정해 충칭의 빌딩청소, 집꾼 방방, 마오타이의 양조장 그리고 중국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인플루언서 왕홍의 트레이닝 과정을 봤다. 늘 승부욕이 강하고 멤버들을 자상하게 이끄는 추성훈과 동물적인 방송감각을 가진 곽튜브, 그리고 생각보다 따뜻하고 정이 많은 분위기메이커 이은지의 조합은 PD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너지 효과를 냈다.
“저는 주로 곽준빈씨와 일을 해서 이은지씨와는 처음이었어요. 활발한 면 속에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함이 있더라고요. 역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송)

“빌딩청소를 하면서 곽준빈씨가 ‘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무서워하는 장면을 방송적으로 잘 풀어내더라고요. 방송을 모르면 또 가학적인 리액션이 되는데, 마지막에는 나름 극복하는 모습도 보여주면서 분량을 만들어내더라고요.”(안)
이들은 다시 무대를 이집트로 옮겨, 이집트의 각 도시에서 유명한 직업을 경험하고 식도락도 즐긴다. 모두 여행 프로그램 연출 경험이 있는 두 PD는 ‘추성훈의 알래스카 택시영업’(송PD), ‘인도네시아 나룻배 참치잡이’(안PD)를 꼭 담고 싶은 직업으로 골랐다.

“TV를 보시는 분들 모두 세계 여행자처럼 눈이 높으세요. 예전 여행 예능이 단순히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대리만족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을 하는 모습이 대리만족이 되는 여행 예능이 유행할 거라고 봅니다.”(송)
“여행지가 주인공이었던 여행 예능은 이제 끝날 것 같아요. 결국 누구와 가는지가 중요한 시대가 될 것 같습니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나 ‘독박투어’ 모두 그 관계성에 집중했거든요. 인물과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여행예능 2.0’ 시대가 올 것 같습니다.”(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