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시작합니다.”
중국 청소기 브랜드 ‘드리미’ 관계자의 말에 50여명은 돼 보이는 관람객이 숨을 죽였다. 새로운 로봇청소기 ‘사이버 X’ 시연을 보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사이버X는 길다란 앞바퀴 두개를 계단에 걸치더니, 몸체와 뒷바퀴를 일자로 세워 계단을 올랐다.
독일 베를린 ‘메세 베를린’에서 9일까지 닷새간 열린 국제 가전전시회(IFA2025)에서 ‘중국의 급부상’이 재확인됐다. 참가 기업 1700여곳 중 694곳이 중국 기업이었다. 그중에서도 TCL과 하이센스, 하이얼, 드리미 등은 대형 전시장을 화려하게 꾸려 존재감을 과시했다.
■중국 청년의 자신감
“스마트폰이나 디스플레이 부문에선 한국 기업들이 여전히 최정상입니다. 하지만 로봇청소기는 다릅니다. 중국이 한국과는 다른 강점을 보여주고 있죠.”
사이버X 시연이 끝난 뒤 드리미 부스 한쪽에서 20대 중국인 남성을 만났다. 중국의 전자·IT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 한·중 대표 기업들의 기술력을 비교해 달라고 질문했다. 그는 “여전히 한국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했지만 “중국은 혁신 토대가 탄탄하다”고도 했다. 풍부한 인적 자원과 토론 등 혁신을 촉진하는 환경, 공급망 지원 등을 이유로 꼽았다.
그의 말대로 로봇청소기 분야의 ‘혁신’은 돋보였다. 로봇팔을 꺼내 양말을 주워 제자리에 갖다 놓거나(로보락) 1회 충전으로 최대 1000㎡를 청소할 수 있고(에코백스) 흡입력이 2만5000㎩(로보락)에 달하는 첨단 로봇청소기가 줄줄이 이어졌다.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는 청소기, 수중에서 벽면을 닦는 청소기, 잔디를 깎는 로봇 등도 선보였다.

다만 중국 로봇청소기는 집 안 영상이 유출될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등 보안 우려가 상당하다. 그럼에도 전시관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삼성과 LG 신제품은 데이터를 강력 보호하는 보안솔루션 ‘녹스’와 ‘LG쉴더’ 적용을 내세우고 있다.
올해 IFA에는 실험적인 로봇도 많이 등장했다. 로봇 축구대회인 ‘로보컴 2025’ 우승자 로봇(K1·T1, 중국 ‘부스터 로보틱스’ 제작)은 축구 경기를 펼쳐 보였으며, 감정적 대화가 가능한 아이돌봄 로봇 ‘에이미’(중국 TCL)도 인기를 끌었다. 다만 삼성·LG의 AI집사 로봇 ‘볼리’와 ‘Q9은 이번 전시에 불참했다.
■“진정한 경쟁자 됐다”

혁신은 전통 가전 분야에서도 확인된다. 프리미엄 TV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거론되는 RGB(빨강·초록·파랑) 발광다이오드(LED) TV가 대표적이다. 이 TV는 하이센스가 가장 먼저 출시·양산(올해 4월)했다. 뒤이어 삼성전자가 IFA2025에서 LED 소자를 100㎛ 이하로 줄인 제품을 선보였다. 삼성전자가 기술 우위를 점하긴 했으나 ‘후발주자’가 된 셈이다.
TCL와 하이센스는 RGB LED TV를 전시관 전면에 배치해 “새로운 프리미엄 TV는 중국이 먼저 시작했다”라는 메시지를 깔았다.
AI가전과 AI 홈 역시 삼성·LG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이얼과 하이센스는 집 안 가전들을 각각 ‘hOn’ ‘커넥트라이프’라는 플랫폼에 연결해 손쉽게 제어하는 체계를 소개했다. 이들은 세탁기 전력 소모를 줄이고, 냉장고 식재료 보관 기한을 관리하는 AI 가전도 다수 선보였다.

하이센스 부스를 빠져나오다 ‘열공’ 중인 한국인 관람객을 마주쳤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였다. 그는 AI 가전을 세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둘러본 소감을 묻자 조 CEO는 “올해도 중국의 약진이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중국은 갖고 있는 제품들을 일단 다 소개하고 시장 반응을 살핀 뒤 빠르게 대응하는 전략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대응 속도와 규모를 볼 때 이제 진정한 경쟁자가 됐다”고 말했다.
9일 폐막하는 IFA2025는 중국의 자신감과 한국의 경계심이 교차한 무대였다. 중국 가전 산업은 더 이상 값싼 제품으로만 승부하지 않는다. 혁신을 앞세워 프리미엄 시장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이번 전시회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글로벌 가전 시장 패권 경쟁의 막이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