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김병호 시집 '슈게이징'...사랑의 불안과 고독

2024-11-19

몽환적 인디록 스타일로 사랑을 형상화

이별 후 남은 감정의 서늘한 아름다움 그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당신이 그랬듯이 꽃이 다 지고서야 봄을 알았지// 싸리비로 꽃잎을 쓸면 겨우 지운 이름에 다시 얼룩이 들고//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하루 내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릎을 안고 가만가만, 눈썹을 뜯어 하늘에 붙이지// 그러면 쇠를 부리는 이가 어디 있어 꽃니 자국 같은 섬광을 비춰주지// 당신이 그랬듯이 봄은 다시 오지 않을 테지만 녹슨 철문 닫듯 밤이 오면// 나는 시치미 떼듯 초승을 따다 이마에 붙이겠네// 뒷짐을 진 채 궁리도 없이 안녕을 들여다보겠네// 마음이 묶여 다리가 없는 나는// 구름 너머의 빗소리를 약으로 들으며// 오늘도 빚지는 일만 늘어나겠지만' -'슈게이징- 어제의 정성' 전문.

김병호 시인의 시집 '슈게이징'(시인의일요일)은 제목부터가 독특하다. 슈게이징(Shoegazing)은 198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인디록의 한 장르다. 몽환적인 사운드와 내밀하고 폐쇄적인 태도가 특징이다. 신발(Shoe)과 뚫어지게 보다(Gaze)의 합성어가 의미하듯 죽어라 자신의 발만 응시하고 연주하는 무대매너 때문에 붙여졌다.

김병호는 이 시집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추적하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탐구한다. 그가 형상화하는 사랑은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지독하고, 때로는 서늘하다. 사랑이 주는 아픔과 그로 인한 고독은 시인의 숙명이다. 신발만 내려다보고 연주하는 록커처럼 시인은 부질없는 사랑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빈방에서 일어난 아침/ 벚꽃 그늘이 창문에 닿아 있습니다// 저 그늘을 어디쯤에 옮겨야 할지를 궁리하다/ 오롯이 남은 정오가 왔습니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만한 일은 내일에도 없을 테니까요// 벚나무는 보이지 않아도, 수많은 발자국을 껴입은 벚나무를 생각하다 오후를 맞습니다// 배관이 터진 보일러 같은 삼월입니다/ 어쩌자고 다시 스무 살입니다// 망울 속으로 캄캄하게 허공을 폈을 꽃을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찾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마음을 자꾸 내밉니다// 꽃집에서 팔지 않는 꽃들은 이미 떠나기로 한 결심 같다고 언젠가 당신이 이야기했습니다/ 벚나무를 가로수로 심는 마음을 이제 야 짐작합니다// 어제도 없이 나는 이 먼 데까지 왔습니다./ 보람도 없이 조금 더 늙어야 할까 봅니다' -'슈게이징- 벚나무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문.

시인은 사랑을 하면서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하는 불안과 고독에 대해 천착한다. 익숙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사랑을 반추한다. 시인이 강조하는 건 특히 이별 후의 정서다. 사랑의 끝, 즉 이별이 가져오는 정서적 혼란과 그리움을 아름답게 서늘하게 노래한다. 격렬한 사랑의 끝에는 고독과 불편, 이별의 아픔이 남는다는 걸 반어적으로 드러낸다. 사랑의 이면에 얼룩처럼 남은 아름다움마저 고요하게 들여다본다.

오직 시선을 바닥에 두고 연주하는 록커를 닮은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다.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同)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현재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값 12,000원.

oks34@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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