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서랍에서 이야기를 한 자락 꺼낸다
낙타를 한 마리 꺼낸다
두루마리처럼 말아 둔 계절을 펼쳐
수없이 증식하는 춘하추동을 꺼낸다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 어둠을 꺼낸다
어둠보다 어두운 사람을 꺼낸다
그가 자신의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찾아낸다
거울 속엔 사물함처럼 차곡차곡 쌓인 도시
의안 같은 창과 창
꼭 다문 문과 문
그는 높이 뻗어가는 콘크리트 숲으로 들어간다
의심스러운 골목들을 지나
이야기 속에 매복한 더 무서운 이야기와 맞닥뜨린다
이야기는 변태를 거듭하고
다족류처럼 여러 개의 다리가 돋아나 돌아다닌다
전선이 탯줄처럼 엉킨 도시
태아처럼 매달린 집과 집들
깨진 거울의 틈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매듭과 코를 잘라낸 이야기
몸통을 토막 내 피투성이가 된 이야기
걸쭉하게 끓여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야기
고양이들이 서랍장을 열고 들어가 냄새를 맡는다
칸칸마다 차지하고 찢긴 꿈을 꾼다
◇서영처= 경북 영천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음악과에서 바이올린 전공. 영남대학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2003년 계간 《문학 . 판》에 〈돌멩이에 날개가 달려있다〉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피아노 악어』(열림원, 2006), 『말뚝에 묶인 피아노』(문학과지성사, 2015)와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계명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
<해설>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찬 서랍은 문명의 도시일 것이고 도시의 이면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진실들일 것이고, 만져지지 않는 사랑일 것이고, 감춰진 눈물일 것이다. 목마름을 감춘 채 낙타가 걸어 다니고, 콘크리트 벽은 높아지고, 이야기는 왜곡되어 다족류로 기어 다니고, 그리움은 자꾸 끓다가 결국 남는 게 없고, 밤을 좀 아는 고양이들은 서랍을 열고 들어가 칸칸마다 찢긴 꿈을 낳으려 하고, 그러니 시인은 우울할 수 밖에..., 아무튼 이 시에서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이미지는 “전선이 탯줄처럼 엉킨 도시/태아처럼 매달린 집과 집들/깨진 거울의 틈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가 주는 어떤 암시성엔 존재(거울)의 슬픈 바닥을 칠 만큼 쳤으니, 이제 남은 건 오로지 달뜨기를 기다리는 그믐의 심정 바로 그것이 아닐까?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