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케네디센터 코드인사 논란

2025-02-23

정치색과 무관하던 예술의 중심

트럼프가 ‘셀프 이사장’ 취임하며

성소수자 공연 등 취소 이어져

예술에도 인위적 개입이 통할까

미국 워싱턴 포토맥강변에 위치한 공연장 케네디센터는 미국의 문화, 역사, 정치가 교차하는 곳이다. 뉴욕의 링컨센터도 미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이지만 케네디센터는 공공기관으로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보다 집중하는 곳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래선지 비싼 공연도 있지만 합리적 가격 혹은 무료로 수준 높은 공연을 제공하는 경우도 많다.

정부 지원을 받으면 정치적 색깔을 띠기 쉽지만 오히려 케네디센터는 초당적 운영의 모범 사례로 알려졌다. 1955년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설립 계획을 세워 후임인 민주당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 건립에 속도가 붙었고 민주당 린든 존슨 대통령을 거쳐 1971년 공화당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재임기에 완성되기까지 16년간 초당적 이사회를 구성하는 전통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 전통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박살내 버렸다. 12일(현지시간) 그는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이사장 등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임명한 이사회 구성원들을 해고하고 스스로를 케네디센터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케네디센터가 ‘드래그쇼’를 공연했기 때문이라며 “케네디센터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이달 예정됐던 성소수자(LGBT) 합창단의 공연이 뒤이어 취소됐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조치를 트럼프 대통령의 ‘복수’라고 짚었다. 2017년 트럼프 1기 당시 TV프로듀서 노먼 리어, 무용가 카르멘 드 라발라드 등이 케네디센터 명예상을 수상한 뒤 정부 정책에 대한 반발로 백악관 리셉션에 참석하지 않아 칼을 갈았다는 것이다.

지난 한 주간 예술계 인사, 예술을 사랑하는 워싱턴 사람들의 분노가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미국인들은 이를 연방 공무원 해고, 다양성 채용 금지 등과 또 다른 차원에서 미국적 가치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듯하다. 러시아 전문가인 질 도어티 우드로윌슨센터 선임연구원은 페이스북에 “트럼프는 케네디센터에 그가 보고 싶은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한 번도 케네디센터에 가보지 않았다고 한다”며 “아마 (케네디센터의) 오페라나 콘서트들은 그의 흥미를 끌기 어려운가 보다”라고 비꼬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운동 노래로 활용됐던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부른 컨트리 가수 리 그린우드가 케네디센터 이사로 새로 임명된 것, 2020년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사회에 앉힌 그의 친구이자 모델 매니지먼트사 대표 파올로 잠폴리가 케네디센터에 보트와 수상택시 정박 시설을 만들고 복도에서 고급 패션쇼를 열겠다고 한 것들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정치적 격변기에 케네디센터가 당면한 진짜 위험은 재정 문제라는 분석을 내놨다. 연간 예산 2억6800만달러 중 정부 예산은 4400만달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기부금과 일반 대중이 구매한 티켓값, 연간 회원권 구독료로 운영된다. 트럼프 색이 입혀진 케네디센터에 자존심 강한 워싱턴 관객들이 와서 티켓을 사고 기부를 할까. 지난해 대선에서 워싱턴 특별구 선거결과는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가 90.28%, 트럼프 대통령이 6.47%였다. 폴리티코는 “패션쇼 티켓이나 보트 주차권, 고급 와인 서비스가 티켓 판매 손실을 만회할 수 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성소수자 합창단뿐 아니라 공연이 예정된 다른 예술가들이 공연을 취소하는 사례도 생기고 있다. 동독 공산 정권 붕괴를 취재한 워싱턴포스트 기자 마크 피셔는 칼럼에서 서방으로 떠나지 않고 동독에 남아 저항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와의 인터뷰를 회상하며 “예술가들의 선택은 자유지만, 공연장에 남아 새로운 시도(저항)를 하는 예술가들에겐 감사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격렬한 논쟁이 이어지는 중 이번 주 조성진이 케네디센터에서 3시간 동안 난곡으로 꼽히는 라벨의 곡을 연주했다. 감동한 앞줄 할아버지 관객들이 벌떡 일어나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자 관객석 전체로 기립박수가 번졌다. 한국에도 정권마다 문화계 코드 인사 논란이 반복됐지만 평가는 결국 대중이 어떻게 그 결과물을 받아들이느냐로 귀결되곤 했다. 문화만큼 인위적 개입이 뒤탈을 만드는 것도 없다. 케네디센터에 그날 같은 기립박수가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홍주형 워싱턴 특파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