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 재단 270억 투척, 미 최대 미술축제 PST아트 대장정 개막

2024-09-22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글렌데일의 공공도서관 브랜드 라이브러리. 이곳 아트센터 1층 전시장 바닥에 흙이 없는 풀밭이 조성됐다. 땅에 뿌리를 내린 대신 작은 전자 기기에 몸을 의지하고 선 갈색 풀들은 때때로 크게 흔들리곤 했다.

"여러분, 이 풀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화성 탐사선 퍼시비런스(Perseverance) 로버가 화성에서 수집해서 보낸 바람 데이터입니다. 화성에서 보낸 데이터를 지구에서 받기까지는 약 7~14분이 걸립니다."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나온 연구원이 설명한다. 이 작품은 키네틱 아티스트 데이비드 보웬의 '풀밭'. NASA JPL의 과학자·엔지니어들과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준비한 전시 '혼합된 세계:행성 간 상상의 실험'에서 선보인 10점의 작품 중 하나다.

한편 이튿날인 15일, 미국 서부 최대 규모의 미술관 라크마(LACMA·LA 카운티 미술관)에선 '우리는 그림 속에 산다: 메소아메리칸 예술 속 자연의 색'이란 전시가 개막했다. 이 전시에선 전통 기법 염색을 주제로 한 멕시코계 미국 작가 포르피리오 구티에레스의 대규모 설치미술이 눈에 띄었다.

구티에레스는 '메소아메리칸 예술 다시 보기'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는 L.A.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스타 작가 중 한 명이다. 라크마의 또 다른 전시장에선 현대 예술에 접목된 디지털 기술을 살펴보는 전시 '디지털 목격자'와 상대성 이론 등 과학 이론을 반영한 조시아 매켈러니의 조각 작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게티 재단의 지원으로 L.A. 일대와 샌디에이고까지 남부 캘리포니아 주요 미술관·박물관 등 70여 개 기관에서 5개월 간 이어지는 'PST 아트'가 15일 공식 개막했다. 일부 전시는 10일부터 문을 열었다. '예술과 과학의 충돌'이라는 주제 아래 과학과 예술의 렌즈로 우리의 미래를 탐구하는 대규모 미술 축제다. 이 행사엔 게티 재단이 약 270억원을 지원했으며, 각 기관이 5년에 걸쳐 준비했다. 전시에 참여한 아티스트만 800여 명이다.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이 거대한 실험실이자 전시장이 됐다.

PST 아트는 이번이 세 번째다. 2011년 10월~ 2012년 3월 첫 행사에선 L.A.의 미술사를 짚었다. 이어 2017년 9월~ 2018년 1월 행사에선 라틴 아메리카 예술의 맥락을 추적했다. PST는 '태평양 표준시간대(Pacific Standard Time)'란 뜻으로, 앞서 PST였던 행사 명칭을 예술 행사로서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올해부터 PST 아트로 변경했다. PST 아트는 앞으로 5년 간격으로 계속 열릴 예정이다.

도시 전역의 기관이 참여하는 예술행사라는 점에선 국제 비엔날레 미술제와 비슷하다. 그러나 비엔날레처럼 총감독이 전시작을 고르는 방식이 아니라, 각 참여 기관에 작가 선정 등을 전적으로 맡기고 게티 재단은 자금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올해 주제인 '예술과 과학의 충돌'은 각 기관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콘텐트로 다채롭게 변주된다. 그리피스 천문대, 아카데미 뮤지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버치 아쿠아리움, 자연사 박물관. 헌팅턴 라이브러리 보태니컬 가든도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다양성을 최대한 폭넓게 포용한 점이 돋보인다.

어떤 전시가 만들어졌나

우선 이 행사를 주도한 게티 센터는 풍부한 컬렉션과 넓은 전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며 '플래그쉽' 역할을 톡톡히 했다. '루멘(Lumen): 빛의 예술과 과학' '확대된 경이로움:18세기 현미경' '추상화된 빛: 실험 사진' 등의 전시를 개막하고, 헬렌 파시안과 찰스 로스의 설치 작품 2점을 선보였다. 기원전 800~1600년 빛의 과학이 중세의 예술과 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 '루멘' 전시엔 중세 시대 서적과 장식품 등 유물들이 대거 나왔다.

L.A. 현대미술관(MOCA)의 분점인 게펜에서는 '올라퍼 엘리아슨: 오픈' 전시가 열려 작가의 최근작 12점을 선보였다. 헌팅턴 라이브러리 미술관의 전시 '스톰 클라우드(폭풍 구름): 기후 위기의 기원을 상상하다' 역시 섬세하게 기획된 전시로 손꼽을 만하다. 1780년부터 1930년까지 산업화와 세계화된 경제가 일상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약 200점의 예술 작품과 자료를 통해 보여줬다. 이밖에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은 질환과 장애라는 주제를 현대미술과 접목한 전시를 선보였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L.A. 해머미술관 전시엔 국경 넘는 쓰레기를 소재로 작업해온 양쿠라와 제주 해녀를 주제로 작업한 리서치 밴드 '이끼바위쿠르르'의 영상과 설치 작품이 전시됐다. '인디고의 예술과 과학'을 주제로 한 샌디에이고 밍게이 뮤지엄 전시엔 이영민, 크리스티나 킴, 사라 장의 작품이 출품됐다. 또 미디어 아티스트 서효정의 작품(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 한국계 청각 장애인 크리스틴 선 킴(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의 벽화도 눈에 띄었다.

"새로운 전시 모델 만든다"

본래 PST 아트의 시작은 조앤 와인스틴 게티 재단 디렉터와 앤드루 퍼척 게티 미술연구소 부소장이 함께 기획한 소규모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였다. 이들은 "L.A. 지역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의 아카이브 연구를 지원하고자 시작했다"며 "갈수록 참여를 원하는 기관이 늘면서 판이 커졌다"고 말했다.

행사는 내년 2월까지 이어지며 전시 뿐만 아니라 콘서트부터 강연, 산책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프로그램이 함께 열린다. 캐시 플레밍 게티 재단 회장 겸 CEO는 "PST 아트는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전시 모델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70개 이상의 기관이 조화를 이루는 전시는 '창조와 협업의 도시'인 L.A.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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