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룰(rule)'에 '한국식 타임 스케줄'은 안 통한다[윤경환 특파원의 브레이킹 뉴욕]

2025-09-14

올 7월 미국에 입국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회보장국(SSA)에서 사회보장번호(SSN)를 신청하는 일이었다. 장기 비자 특파원·주재원들은 SSN을 확보하지 못하면 현지 정착을 위한 모든 과정에서 번번이 제동이 걸린다. 뉴저지주의 SSA 시스템이 최근 100% 예약 의무제로 바뀐 것을 모르고 갔다가 헛걸음을 쳤다. 당장 1~2주 안에 특파원 업무에 투입돼야 하는 상황에서 수령에만 최장 6주가 걸리는 SSN을 두 달 뒤에나 신청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듣고 눈앞이 깜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급한 마음에 거주지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 지역 SSA까지 달려가 현장 신청을 받아달라고 사정하며 “다음 주부터 일을 해야 하는 긴급 상황”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담당 직원이 낯빛을 바꾸며 “당신은 SSN을 받기 전에는 결코 이 나라에서 일을 할 수 없다”고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집을 구하고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라고 둘러댄 뒤에도 한참 의심받다가 겨우 위기는 모면했지만 이 같은 불협화음은 이후에도 미국 내 모든 행정 처리 과정에서 반복됐다. ‘미국의 룰(rule)’을 한국식 타임 스케줄에 맞춰 돌파하려다 곤란한 지경에 빠질 뻔한 사례다. 미국의 느리고 강압적인 행정 처리와 한국 본사의 무관심, 일방 지시 속에서 속을 태우는 것은 대다수 주재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미국에도 그들만의 ‘원칙’과 ‘속도’가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더 가깝다. 바꿔 말하면 한국인이 세계적으로도 너무 급하고 ‘정(情)’과 ‘융통성’의 문화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무용담처럼 돌고 있는, 신분·거주를 제대로 증명하지 않고 미국 행정의 벽을 넘은 사례는 자기 나라의 새로운 규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어수룩한 공무원을 만난 요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달 12일 체포·구금 8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조지아주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직원 316명의 사정도 같은 미국 거주 근로자 입장에서는 상당 부분 이해가 된다. 본사의 요구에 맞춰 미국의 원칙을 적당히 무시하고 한국식으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은 대부분 비슷한 까닭이다. 한국에서는 주어진 일을 해내는 ‘근성’으로 평가받는 일이 미국에서는 자칫 ‘추방의 빌미’가 될 수 있다. 한국식 ‘빨리빨리’ ‘까라면 까라’식 기업 문화 앞에서 감히 토를 달지 못할 뿐이다.

더욱이 지금은 외국인의 자국 유입을 극단적으로 꺼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다. 미국의 정권은 계속 바뀌는데 한국 기업이 기존 방식만 고수했다가는 크고 작은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최근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는 직업도 아닌 언론인의 비자(I비자) 기간까지 기존 ‘5년’에서 ‘최대 240일’로 단축했다. 8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할 수 있다지만 그 목적이 단순히 언론 검열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비자 연장의 최대 관건은 240일 동안 미국에서 룰을 제대로 지켰는지가 될 것이다. 11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내가 한국 쪽에 ‘제발 좀 제대로 된 비자(right visa)를 받으라’고 전화까지 했다”고 한 발언이 100% 과장은 아닌 것처럼 들리는 이유다.

트럼프 시대에 미국 내 한국 근로자들이 그 많은 룰의 변화를 세세하게 숙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근로자가 알아서 해결할 일’ 정도로 여기는 한국 본사에서는 아예 입을 닫고 있다. 기업이 먼저 미국의 룰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조지아주 구금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국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모두 다 하려고 무리하면 외려 큰일 날 수 있다”고 했던 대기업 주재원의 충고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이제야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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